아시아장애인, ‘장벽’ 넘어 ‘문학’으로 하나되다

2020 한일장애인공동시집 참여자

2017년부터 아시아장애인들 각국 언어로 공동시집
미얀마·베트남·일본·인도네시아·몽골·한국 등 40여명

장애를 갖고 세상 살아가는 일은 크든 작든 녹록치 않다. 장애인이 살기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어딜 가든지 넘기 힘든 장애물이 많고, 수시로 다가오는 일상의 걸림은 앞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특히 외국여행을 하거나, 다른 나라 장애인들과 교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시아 국가의 경우 대부분 장애인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고, 언어 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2017년 10월 미얀마 랑군에서 열린 첫 대회 양국 참가자들

장애인예술과 불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보리수아래’ 회원들의 어려움과 꿈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오랜 동안 고민하고, 토론하고, 답을 찾았다. 그게 바로 <아시아장애인 공동시집>이다. 한국과 상대 아시아국 장애인들의 문학작품을 두 나라 언어로 동시에 번역하여 수록·발간하는 것이다. 그동안 △2017년 미얀마 △2018년 베트남 △2020년 일본 △2021년 인도네시아 작가 총 39명의 작품이 시집으로 나왔다. 작년 7월 하순 몽골 방문 후 또 하나의 공동시집이 탄생했다.

맨 처음 교류에 나선 미얀마에선 13명의 시인이 시 44편을 냈다. 이에 미얀마어와 한국어로 번역돼 공동시집 <빵 한 개와 칼 한 자루> 1000권이 발간됐다. 시집 발간과 함께 한국의 장애인 작가들과 자원봉사자들이 미얀마 현지를 방문해 ‘한국-미얀마 시 낭송’의 밤을 열었다. 미얀마 시각장애인학교 사서인 미앗 쭈에잉 시인은 “내 시가 외국어로도 번역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눈물을 흘렸다.

한-베트남 장애인공동시집 <시로 엮은 내 사랑을 받아주오>

2018년 한-베트남 공동시집이 발간될 때는 하노이 한국문화원과 하노이대 레당 환 교수의 도움이 컸다. 시인 11명이 41편을 <시로 엮은 내 사랑을 받아주오>란 제목으로 발간했다. 우리는 베트남 장애시인들과 레당 환 교수를 한국에 초청해 북콘서트를 열고 함께 서울 관광에 나섰다. 베트남의 전통 고전시를 주로 쓰는 응우엔 시인은 “시상이 떠오르면 시를 몽땅 암기한다”며 남산 한옥마을 관광 중 즉석에서 시를 지어 낭송했다. 보리수아래 회원으로 미얀마·몽골 방문에 동행한 김영관 시인은 <아시아엔>에 정기적으로 시를 기고하고 있다.

한일 장애인공동시집 <우리가 바다 건너 만난 것은> 표지

코로나19가 세계를 덮친 2020년에는 일본과 한국의 시인 8명의 시 42편(번역본 포함 84편)을 수록한 <우리가 바다 건너 만난 것은>을 냈다. 코로나로 오프라인 접촉이 어려워 기사 검색과 SNS 등을 통해 지명도 높은 작가의 섭외에 나서 온라인 북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뇌성마비를 앓은 호리에 나오코 시인은 “글을 쓰는 일은 지금의 내가 되기 위한 길이었다”며 “시를 통해 내가 일어선 것처럼 내 시를 읽는 사람 모두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길 바란다”고 했다.

한-인도네시아 장애인공동시집 <내가 품은 계절의 진언>

2021년 인도네시아 교류도 코로나로 공동시집 발간에 만족해야 했다. 인도네시아 시인 섭외는 한국인니문화연구원 도움이 컸다. 두 나라 작가 7명의 작품 37편(번역본 포함 72편)에 기존 발간된 미얀마, 베트남, 일본의 작가들 시를 1편씩 더해 공동시집 <내가 품은 계절의 진언>을 펴냈다. 정신장애가 있는 인도네시아의 양가 위자야 시인은 장애인문화 포털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한편 ‘인도네시아정신장애인커뮤니티’를 만들어 정신건강과 관련한 인식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부산 출신 성희철 시인은 아시아장애인 공동시집 참여 이후 지역 문학행사에 자주 초대되고, 장애 인식개선 강사 활동폭도 넓어졌다고 한다. 아시아장애인 공동시집은 한국과 아시아 각국의 참여 작가들에게 문학을 통해 장애 및 언어장벽을 넘어 상호교류의 장을 넓혀주고 있다. 이슈와 인기에 관심 많은 셀럽들과 달리 장애문인들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온 정성을 쏟으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시 한줄이 작가의 꿈을 이루게 하는 매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인니 장애인공동시집 <내가 품은 계절의 진언> 참여 양국 시인들

그동안 참여한 작가들은 개인 시집 한두 권씩 냈다. 자신의 시집이 세종도서에 선정된 시인도 있고,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인증명을 받은 이도 있다. 장애와 국적을 떠나 함께 했던 장애시인들의 시를 향한 열망과 열정은 각자에 내재한 깨침과 울림이다. 그 울림과 깨침이 ‘시어’를 불러내 ‘시’를 탄생시킨다. 지난 5~6년간 우리와 함께 한 아시아 각국 장애인들의 문학에 대한 꿈과 열정은 이제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참여와 연대를 통해 우리의 일상이 돼가고 있다.

지난 7년여 사단법인 ‘보리수아래’는 아시아장애인 공동시집 발간을 어렵사리 주관해왔다. 각계 뜻있는 분들의 도움 덕택이다. 이 사업이 중단 없이 이어지길 바라는 맘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동안 참여했던 각국 대표 시인들 시를 살펴본다.
친구야 너에게 있어서 인생이란
날카로운 칼 한 자루가 될 수 있어
그게 아니라면/설탕 한 컵이나 꿀 한 병이 될 수 있어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인생이란/달콤한 즙이 말라 버린
사탕수수 한 대를/꾸역꾸역 빨고 빨고 있는 것 같아-중략-
친구야
너도 가고 있고 나도 가고 있어
우리가 가야 할 미래 그곳에/이르도록 앞으로 향해 나가자

-미얀마, 미앗 쭈 에잉 ‘빵한 개와 칼 한자루’ 일부

지금 그대는 내 머리카락을 뽑는데
후일에 누가 우리의 풀을 뽑아주겠는가
머리카락이 세지 않도록 사랑하라
후일 풀이 머리에서 자랄 것을 걱정하지 마라

-베트남, 응우엔 비엣 아잉 ‘머리카락과 풀’ 전문

휠체어를 타기 시작했을 무렵
가게 앞에서 생각했어
이 가게에 어떻게 들어갈까?-중략-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것이 지겨워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어
전화를 걸기로 했어
가게 문이 열렸어
나의 마음도 열렸어

-일본, 우에다 시게루 ‘고집’ 일부

곡주 한잔에
보름달이 창백하다
은빛 달빛이 떨리며 희미하다
쥐 한마리가 전염병에 걸렸다는 계절 소식이 들려왔다
어디서나 돌아다녔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각 나라에 재앙을 전달한다?하략-

-인도네시아, 아디피아 뿌뜨라 삐다다 ‘조용한 시-코로나 19’ 일부

문득문득 생각이 나네요
그 여름
문득문득 생각이 나네요
그 사람
어느새 멀리 멀리
도망간 추억이지만
끊은 담배 한모금처럼
기쁠 때나 힘들 때
문득 문득 생각나네요
추억일 때가 그리움일 때가
제일 아름다울 그대가
문득 문득 생각나네요
그 여름 그대가

-한국, 김영관 ‘문득문득’ 전문

장애인공동시집 최명숙 코로나로 온라인으로 진행한 뒤 한국측 참가자들이 단체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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