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장충식 단국대 명예총장 “‘평화·화해의 상징’ 만델라 콘서트홀 세우는 게 꿈”

단국대 천안캠퍼스. 서울에 본교를 대학의 지방캠퍼스 이전의 효시로 꼽힌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에서 장충식 단국대 명예총장을 이렇게 노래했다.

‘독립운동가 장형의 아들/…(중략)/ 해외 유학 중/ 아버지의 별세로 돌아왔다/ 장례 마치고/ 그대로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행여나/ 아버지 생전/ 아버지에게 원수진 사람 있나/…(중략)/ 무려 10여 년이나/ 그 사람들 하나하나 찾아다니며/ 혹은/ 아버지 대신 모자 벗고 빌고/…(중략) 그러고 나자/ 지하의 아버지 생전의 원만한 모습 그대로/ 꿈속에 나타나 흥겹게 노래하시기를/ 식아/ 식아/ 이제 나 구만리 장천 훨훨 날아다니게 되었구나…(이하 생략)’

박정희 대통령은 폐교된 단국대(주간부)를 살리러 온 장충식 명예총장을 보고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한 효자”라고 했다. 서울 용산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권하기도 했다. 장 동문은 정치를 멀리하라는 부친의 유훈에 따라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교육사업가의 길을 걸어왔다.

장충식 단국대 명예이사장

30대에 단국대 초대 총장이자 한국대학 사상 최연소 총장으로 취임해 단국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고, 대학 지방캠퍼스 시대를 열었다. 교육자로서뿐만 아니라 체육인으로서, 남북체육회담 수석대표를 역임하며 분단 이후 처음으로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을 구성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또 대한적십자사 총재 역임 당시에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시켰다.

올해 구순을 맞아 단국대 이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간 걸어온 90 성상에 대해 들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
“작년 12월 23일 이사장직이 임기 만료됐습니다. 명함이 없어요. 요즘 음악을 즐기고 있습니다. 바이올린 연습도 하고. 간간이 잡문도 씁니다. 10여년 전에 썼던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를 압축해서 <아름다운 인연>이란 소설을 냈습니다.”

-50여년간 최장수 총장, 이사장으로 활동해 오셨는데, 퇴임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무거운 짐을 벗어 시원한 마음도 들고, 한편으로는 숙제가 남은 듯한 아쉬움도 느낍니다. 아무리 고생을 해서 산꼭대기에 오른다 해도 때가 되면 하산을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지요. 이제 단국대라는 큰 산을 내려와 새로운 목표를 향해 전진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그간 하루하루를 쫓기듯 살아온 것 같습니다.”

-단국대는 주간부 폐교에서 종합대학 승격, 천안캠퍼스 신설, 부도, 죽전캠퍼스 이전 등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았습니다. 가장 힘드셨던 때는 언제였나요.
“5·16 쿠데타가 일어난 후 중앙정보부는 이사장이신 아버지를 장면 박사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같은 집안이라는 이유로 반혁명 인사로 낙인 찍어 체포령을 내렸습니다. 아버지가 체포되지 않자 저를 잡아 중정 서울 분실에 구금하고 심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고문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모습을 어머니와 아내에게 보여주기도 했고요. 그 후 주간부가 폐교됐고 저는 미국으로 유학 갔는데, 그해 아버님이 폐교로 인해 정신적 타격을 받으시고 큰 병을 얻어 12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김영삼 대통령후보 시절, 도와달라는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정권 내내 고난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천안캠퍼스에 치대병원을 짓기 위해 대출이 필요한데, 받을 수 없어 사채를 쓰기도 했고요. 참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주간부 폐교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은 어떻게 이루신 겁니까.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고 차기 박정숙 이사장님께서 저에게 학장의 중책을 맡기면서 반드시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라는 명을 주셨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연이 닿을 수 있는 사람을 물색해 면담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박 대통령이 저를 보더니 젊은 학장이라며 조금 놀라는 눈치예요. ‘그래 할 말이 뭐냐’고 물으시더군요. ‘단국대를 운영할 수 없어 각하에게 바치려고 한다. 국립대로 키우시든지 해달라.’ 대통령 표정이 굳어져요. 배석했던 비서관이 ‘이런 얘기하러 왔느냐’며 화를 냈죠.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이렇게밖에 올 수 없었다. 독립운동가가 세운 대학을 군인들이 무지막지하게 폐교시킬 수 있느냐. 대통령 반역의 길을 갈지, 충성의 길을 갈지 선택하게 해달라’고 젊은 혈기로 이야기했죠. 대통령이 ‘그래 소원이 뭐냐’고 물으시더군요. 복교시켜달라고 했죠. 아버지를 위한 이런 마음을 박 대통령이 오히려 좋게 보신 것 같아요. 효자라고 하시더군요. 이후 복교를 넘어 종합대학으로 승격됐지요.”

-국내 대학 처음으로 천안에 지방 캠퍼스를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단국대는 해방 이후 늦게 출발한 대학 아닙니까. 꼭 서울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명문사학들이 즐비한데. 대학 없는 지방에 가서 대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충청도는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등이 나온 곳 아닙니까. 이후 우리 대학의 모델을 따라 하는 대학들이 생겼지요.”

-한남동 캠퍼스를 매각하고 용인 죽전 캠퍼스로 옮긴 배경은 어떻게 되나요.
“한남동 캠퍼스가 작아요. 건축법에 저촉돼 기숙사도 지을 수 없고요. 사실 현재 국정원 땅이 됐습니다만, 서울 도곡동에 24만평 부지가 있었지요. 당시 한 공무원의 실수로 그린벨트로 묶이는 바람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통령령으로 그렇게 돼, 행정심판을 청구할 수도 없었고요. 경기도도 발전속도 빠르고, 교통도 크게 불편하지 않으니 죽전에 캠퍼스 부지를 마련하게 됐지요.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만, 잘 정착이 돼서 대학 구성원 대부분이 만족하는 첨단시설의 캠퍼스를 만들었습니다.”

장형 단국대 설립자. 장충식 명예이사장의 부친이다. 부친은 “‘공부하는 학생과 이념, 사상을 가진 학생이 있다면 네가 할 일은 이념, 사상을 가진 학생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장충식은 이를 충실히 따랐다고 한다. 


-단국대는 큰 학내 분규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별한 학교 운영의 비결이 있나요.

“아버님으로부터 ‘공부하는 학생과 이념, 사상을 가진 학생이 있다면 네가 할 일은 이념, 사상을 가진 학생을 보호하는 일이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데모하다, 감옥 갔다온 학생들을 모두 복교시켜줬어요. 중앙정보부에 불려가기도 했지만, 왜 이런 일까지 정부가 이래라저래라 하냐고 항의했죠. 어용 총장이라며 50일간 총장실이 점거되는 일도 있었죠. 시간은 걸렸지만 대화로 원만하게 해결하고, 총장실 점거를 주도했던 학생은 나중에 유학도 보내줬습니다.”

-서울대에 입학해 졸업은 단국대에서 하셨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학도의용대 1기생으로 뽑혔어요. 중국어 특기자로 미군의 8240 특수부대에 배치돼 첩보활동을 맡았습니다. 중국군 동향을 살피는 일이었죠. 활동 중 인민군 부대와 만나 격전을 벌이다, 수류탄 파편에 복숭아뼈를 다치기도 했지요. 1950년 12월 부상병으로 조기 전역 후 이듬해 부산에서 서울대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들어갔지요. 4학년 때 교생 실습을 나가야 하는데, 군 복무 문제가 생겼어요. 짧은 복무 기간 때문이었는지, 미군부대였기 때문이었는지, 군번을 못 받았던 겁니다. 육군에 다시 들어가 졸업을 제때 못 했지요. 갔다 와 보니 아버님이 학적을 단국대로 옮기셨어요. ‘아비가 만든 학교를 자식들마저 기피하면 되겠느냐’는 거예요. 그 바람에 단국대 정치학과 3학년에 편입해 졸업했죠.”

-체육 관련 단체장 활동을 많이 하셨습니다. 운동을 좋아하셨나요.
“서울대 사대에 입학하니, 럭비부가 있었어요. 경성사범부터 이어오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운동부였습니다. 키도 크고, 체격이 좋아 반강제적으로 들어가게 됐죠. 럭비부 전통이 B학점 이하는 선수가 될 수 없어 열심히 공부했고요. 미국 등 선진국 보면, 사회관계에서 스포츠가 무척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저명인사들 대부분이 좋아하거나 잘하는 운동경기가 있습니다. 스포츠가 애국심을 배양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힘이 크죠.”

제21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한 장충식 단국대이사장(오른쪽)이 2000년 8월 1일 서울 남산동 한적 강당에서 전임 정원식총재로부터 한적기를 받고 있다. <사진 동아일보 이훈구기자>

-북한과의 교류에 많은 노력을 하셨는데, 대한적십자사 총재 때 북한을 서운하게 한 일도 있었다고요.
“2차 이산가족 상봉 때 일본에 가 있었죠. 북한에서 원치 않는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는 이유로, 제가 한적 총재로 있으면 안 내려가겠다고 한 거죠. 나중에 평양에 갔을 때 ‘어떻게 인터뷰하든 나의 자유의사까지 막을 수 있느냐’ 그랬더니 ‘윗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며 이해해 달라 하더군요.”

-인생에 좌우명이 있다면 들려주십시오.
“남의 허물을 지적하지 않으며 살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어요. 더러 실수하는 교직원들도 있었지만, 간접적으로 알아듣게끔 이야기하는 정도였습니다. 또 하나는 재산을 갖지 말자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해 재단을 만들었고,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았어요. 자식 하나도 8년 전세 살다 최근 아파트 한 채 구입했습니다. 손자들에게 할아버지 가진 것 없으니, 스스로 열심히 살라고 이야기합니다. 단국대는 부를 위해 부동산을 매입하지 않았어요.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교육 용도 외에는 구입한 땅이 없습니다. 아버님이 주신 ‘정치에 발 들이지 마라’는 말씀을 늘 새기며 살았고요.”

-90 평생 가장 보람된 활동이라면.
“한한대사전 편찬한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30년간 300억원을 들여 만들었지요. 한자 5만5,000자를 비롯해 45만여 개의 단어를 수록했습니다. 중국, 대만, 일본의 사전보다 더 많은 단어가 수록돼 있습니다. 이희승, 이병도, 신석호 선생님 찾아뵙고 단국대에 동양학연구소도 만들어 정말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사전 편찬은 역사 단절을 막기 위한 시도이자 한국학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세계 한국학 연구하는 곳에는 이 사전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앞으로 활동 계획은 어떠신지요.
“200억 사재를 출연해 만든 장학재단이 있습니다. 단국대 졸업생 중 1000명을 1대1로 만나 300억 정도를 더 유치해 500억 규모의 재단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여력이 된다면 ‘넬슨만델라 콘서트홀’도 짓고 싶군요. 용서와 평화의 상징인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의 사상을 이어가는 일이 되겠죠.”

프로필
△1932년 톈진 출생
△휘문고 졸업
△1951년 모교 역사교육과 입학
△1960년 고려대 대학원 졸업
△1971년 중화민국 문화학술원 문학박사
△1960~1989년 단국대 사학과 교수
△1965년 대학배드민턴협회 회장
△1967∼1993년 단국대 총장
△1981년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1991년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 회장
△2000년 제21대 대한적십자사 총재
△체육훈장 청룡장, 몽골 북극성 훈장 등 수훈
△저서 ‘십팔사략’, ‘세계문화사’,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 ‘아름다운 인연’ 등

*이 기사는 <서울대총동창신문>이 제공했습니다. 인터뷰는 <국민일보> 김의구 논설위원(서울대총동창신문 논설위원), 정리는 김남주 <서울대총동창신문> 편집장이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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