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68주년①]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 “죽어도 명예를 지키라”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김홍일은 중국군 출신이었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일본군 학병 출신들 위주로 국군준비대 등을 만들었으나, 이응준·김석원·유승열 등 일본군 대좌 출신들은 자중하고 있었다. 일본군 출신은 자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들은 마땅히 광복군이 국군 건설의 중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기대를 걸었던 분 중에서도 김홍일은 명분과 실력 면에서 으뜸이었다. 김홍일은 1932년 세계를 진동시킨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에 쓰일 도시락 폭탄을 준비하였고, 동경에서 천황에 폭탄을 던진 이봉창 의사의 폭탄도 준비하였다. 김홍일은 중국군에서 소장까지 올라갔고 사단급 부대를 지휘했던 유일한 장군이다.

6·25전쟁 초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다. 시흥 육군참모학교장이었던 김홍일은 김종오의 6사단이 춘천-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2군단을 저지하고 있는 가운데, 후퇴하는 백선엽의 1사단, 유재흥의 7사단, 이형근의 2사단 장병들을 대대 단위로 재편, 한강방어에 투입하였다. 공황에 빠져 후퇴하는 병사를 수습하기란 쉽지 않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밥을 먹여야 한다.

김홍일은 부녀자들을 동원해 주먹밥을 만들어 배를 채웠다. 그리고는 문짝을 때어내어 ‘미군 참전’이라는 플래카드를 큼지막하게 내걸었다. 배가 채워지고, ‘미군 참전‘이라는 말에 용기를 얻은 장병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려 싸울 수 있는 병사가 되어 갔다.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7월 4일까지 북한군을 저지하였다. 김일성이 서울 함락 후에 수일을 지체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수도가 함락되면 전쟁은 끝났다는 ‘상식’ 때문이었을 가능성, 둘째, 박헌영의 남로당원 20만이 궐기하면 후방에서의 전쟁은 끝난다는 장담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박헌영 숙청 이유다. 그러나 이나마 서울을 지탱한 것은, 김종오의 6사단이 서울 외곽으로 진출하려는 북한군 2군단의 기동에 차질을 빚게 한 것과, 김홍일의 시흥지구전투사가 한강방어선을 1주일 동안 지탱해낸 것이 결정적이었다.

6월 28일 영등포에 온 맥아더는 한국군이 궤산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 지상군의 투입만이 이 사태를 막아낼 수 있다고 트루먼 대통령에 건의하였다. 이때 노량진 언덕에서 분전하고 있는 한국군 병사에게 “귀관은 언제까지 이 언덕을 사수할 것이냐”고 묻자 “명령이 있을 때까지”라는 단호한 답변을 듣고 크게 감명받아 “이러한 청년들이 있는 한국은 지켜줄 가치가 있다”고 결심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이는 한국군 장병의 감투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한강선 방어의 主將 김홍일의 불굴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강선 방어 이후 김홍일은 1군단장으로서 미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이전, 낙동강 전선에 이르기까지 지연전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1951년 김홍일 장군을 주중대사로 보내면서 이승만 대통령은 五星將軍이라는 휘호를 내렸다. 국군에 원수(元帥) 계급은 없지만, 김홍일의 공은 元帥로 임하기에 족하다는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고, 분명하게 책임을 완수하며, 죽어도 명예를 지키라.” 五星將軍 김홍일 장군은 우리 군의 영원한 정신적 사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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