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 창안] 한글 창제, 세종의 국가운영 전략이었다

문자 창안, 그 역사 문화적 배경 (1)

우월성·독창성 신화 벗어나야…사상 최대 국가프로젝트 재조명

중국 역사상 3대 국책 문화사업이라면 명나라의 영락대전(永樂大典), 청나라의 강희자전(康熙字典)과 사고전서(四庫全書)를 들 수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영락대전은 영락제의 명으로 편찬된 백과사전이고, 강희자전은 강희제에 의해 만들어진 한자사전의 결정판이며 사고전서는 건륭제가 국가사업으로 그때까지 간행된 책을 최대한 망라한 총서(叢書)다. 중국은 전대 왕조의 정사 편찬과 책력, 운서(韻書) 간행을 정통 왕조의 특권이자 책임으로 여겨왔다.

한국사에서는 어떤 국가프로젝트를 3대 문화사업으로 볼 수 있을까? 고려 대장경과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한글 창제를 손꼽을 수 있을 듯하다. 고려 대장경은 고려 왕실이 거란족 요나라의 침입에 불력을 빌려 물리치려고 간행한 초조대장경으로부터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속대장경에 이어 몽골족을 몰아내기 위해 국력을 온통 기울여 판각한 8만대장경판을 두루 일컫는 총칭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27대 518년(1392~1910)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술한 역사서로서,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장구한 기일과 방대한 규모, 정확한 기록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 업적은 단연 한글 창제라는 데 이론이 별로 없다. 다만 민족주의적 자존자대가 지나쳐 한글이 ‘세계 최고의 문자’라든가 ‘한글은 어떤 외부 영향도 없는 완전히 독창적인 문자체계’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다. 이런 견해나 주장이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언어학자들은 선사시대에 거의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져 진화한 고대 문자는 말할 나위 없고 역사시대에 제정 또는 고안된 근대문자를 통틀어 한글이 가장 과학(음성학)적이고 철학(성리학)적인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현대 언어학이 급속히 발달하고 표기체계가 없는 언어에 문자를 도입하는 실험이 거듭되면서 한글만이 과학적인 문자라는 주장이 전적으로 성립하기 어렵게 됐다. 게다가 수학이 언어와 매우 유사한 상징체계라는 사실과 수리논리학을 기초로 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등 형식언어(formal language)가 자연언어(natural language)를 일정 부분 대체해 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최근에는 톨킨의 에 등장하는 ‘텡과르’ 문자 등 판타지 소설과 영화, 비디오게임을 위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언어와 문자를 문법과 어휘, 알파벳을 포함해 정교하게 만들어내는 가상언어(constructed language)도 잦아졌다.?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한글의 과학성은 “당대 인간지식의 최고 수준을 반영했다”는 정도의 평가가 적절할 것이다.

한글에 관한 또 하나의 신화는 한글이 느닷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완벽하게 독창적인 발명품이라는 시각이다. 조선시대 실학자들을 비롯해 많은 학자들이 한글의 유래와 창제 원리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제기했다. 세종실록에 최만리가 훈민정음은 “고전(古篆)을 본 땄다”고 말한 기록이 있어 고전이 한자의 전자체(篆字體)라는 설과 ‘몽고전자(蒙古篆字)’의 가운데 두 글자를 뜻하기 때문에 몽골의 여러 문자 가운데 ‘파사파 문자’를 말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었다. 산스크리트 문자(梵字)를 따왔다는 설과 이른바 ‘가림토 문자’와 일본의 ‘신대문자’ 등 고대문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나왔다. 심지어 세종대왕이 왕궁의 창을 보고 창살과 창문 고리를 따서 하룻밤 새 만들었다는 설이 전해지기도 했다. 독일인 신부로 한국에서 1909년부터 20년간 선교사를 지냈던 안드레 에카르트 교수는 1932년 교수자격논문 ‘한글의 기원’에서 이런 견해를 표명했다.

그러나 1940년 훈민정음해례본이 경북 안동에서 발견되면서 이런 구구한 억측은 대부분 사라졌다. 해례본의 ‘제자해’가 너무나 또렷하고 확실하게 제자원리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게리 레드야드 미 컬럼비아대 교수 같은 일부 학자들은 한글이 파사파 문자를 차용했다는 주장을 펼친 논문을 발표했다. 1980년대 들어 한글이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와 닮았다는 지적과 함께 출처불명의 가림토 문자, 일본의 신대문자를 모방한 것이라는 주장이 TV다큐멘터리와 잡지 기사를 통해 개진됐다. 하지만 신대문자처럼 후대의 위조문자이거나 가림토 문자처럼 출처불명이어서 신빙성이 없는 주장이 대부분이었고, 구자라트 문자와의 외형적 유사성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다만 파사파 문자의 경우 획을 더하여 파생문자를 만드는 부분의 제자 원리와 기하학적 모양이 한글을 창제하는 데 부분적 영감을 줬을 가능성까지는 배제할 수 없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면서 몽골·거란·여진·서하·티베트·위구르 등 북방 유목민족의 문자를 폭넓게 섭렵, 참조했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한글은 논리적 과학성과 탄탄한 철학적 토대, 뛰어난 독창성은 물론 실용성과 용이성, 역사적 생명력까지 갖춰 세계적으로 범용성 높은 로마자(라틴 알파벳)를 제외하면 역대 문자체계 가운데 견줄 만한 상대가 없는 독보적 존재라 할 수 있다.

한글에 대해 과대·과소평가를 동시에 지양하고 흔히 갖고 있는 오해를 털어낼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한글 창제 배경에 대해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여기서 거듭 생각해 볼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첫째는 한글 창제의 시대적 배경, 둘째는 한글 창제를 통한 세종대왕의 국가운영 전략이다.

첫째 관점을 살펴보자. 한글은 한민족만의 특별한 유산이라기보다 북방 유목민족들이 만들고 사용해온 다수의 고유 문자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세계 문자의 역사를 보면 크게 페니키아 알파벳을 비롯한 서아시아 표음문자와 중국의 한자 등 동아시아 표의문자가 각각 전파, 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최신 언어학 연구결과에 따르면 페니키아 알파벳 자체도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표음적 요소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당대 인류 최고 지식수준 반영

문자체계 족보를 간단히 요약하면 아시아 북방 유목민족들은 크게 세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첫 째, 소그드 문자 영향을 받아 8세기부터 쓰인 위구르 문자를 변용한 13세기 초 몽골 문자, 몽골 문자를 차용한 17세기 만주 문자(청나라)다. 둘째, 한자를 바탕으로 만든 10세기 거란 문자, 거란 문자를 크게 바꾼 11세기 서하 문자와 조금만 변형한 12세기 여진 문자(금나라)다. 셋째, 인도의 영향을 받은 7세기 티베트 문자와 티베트 문자를 약간 바꾼 13세기 말 파사파 문자다. 이밖에 고대 돌궐(투르크)족이 쓰던 오르콘 문자는 8세기에서 10세기에 쓰였고 소그드 문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글은 창제과정에서 파사파 문자로부터 일정한 시사점을 얻었다고 할 수 있지만 위 족보에 편입시키기에는 비길 바 없을 정도로 독창성이 강하다. 콘텐츠에 관한 한 거의 유일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고유 문자의 필요성과 효용성은 그 이전부터 북방 유목민족국가들에 널리 퍼져 있었다. 흉노족의 문자 사용 여부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앞서 말했던 8세기 이후 돌궐족과 위구르족, 거란족, 서하족은 나라를 세운 뒤 한결 같이 고유 문자를 제정했다. 그러나 본격적 발전 계기는 징기스칸이 1204년 위구르 문자를 변형해 몽골 문자로 제정한 것이었다. 그 이전 위구르 문자나 티베트 문자는 서아시아에 치우쳐 있었고 동아시아까지는 직접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몽골은 현재의 몽골공화국 동부에서 시작해 북방의 여러 민족을 통합한 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를 정복하고 동아시아의 여진족과 고려를 복속시킨 뒤 결국 중국 전역을 차지한 세계 제국이었다. 당연히 그 영향력이 정복지역 전체에 미칠 수 밖에 없었다. 몽골이 쇠퇴한 이후에도 청나라처럼 유목민족이 세운 정복국가는 몽골의 본을 따서 각종 문물제도는 중국의 것을 따를지언정 한자 외 민족 고유의 문자체계를 갖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왜 문자 창제의 물결을 좀더 일찍 타지 않고 15세기에 이르러서야 한글을 창제하게 됐을까.

고려는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이후 7차례 28년 동안 몽골과 전쟁을 벌였고 1270~1356년 공민왕의 반원개혁까지 몽골의 간접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고유 문자를 제정할 만한 의지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후에도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급변하는 정국에서 문자 창제는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과업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 태조·태종대를 지나 정치적 안정이 이뤄지고 국가의 뿌리가 내려진 이후에야 문물을 갖추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우리나라는 원래의 북방 기마민족이 남하해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한 국가를 세웠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다른 북방언어에 비해 왜 늦었나

조선시대 말 조선인의 연변 이주가 이뤄지기 전까지 동아시아의 농경한계선은 대략 북위 40도였다. 한반도에서 북위 40도는 의주를 지난다. 즉 압록강 북방의 요동지방은 과거 완전한 농경지대라기 보다는 ‘반농반어(半農半漁)’와 수렵·채취를 병행하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북방 유목민족이 남쪽으로 내려와 농경민족화된 나라라 할 수 있고, 유목사회의 전통을 더 많이 갖고 있던 다른 북방국가에 비해 중국 문화와 문물제도에 대한 수용성이 높았다. 고려는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해 문화적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그 우월감의 근거는 고려가 문화적으로 더 중국화, 즉 당시 기준으로 세계화돼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고려는 고유 문자체계를 굳이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세종대왕은 이 모든 것을 바꿨다. 그는 한편으로 중국의 선례와 기준에 따라 조선의 문물을 정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중요한 것은 세종대왕이 단순한 ‘소중화(小中華)’의 건설에 얽매이지 않고 북방 유목민족국가들의 포부와 의지를 상당 부분 공유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문화적 정체성’이다. 즉 세종대왕은 중국문화의 정수를 수용한 위에 북방민족의 기상과 위력을 얹으려고 했던 것이다. 여기에 세종대왕의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민본주의가 한데 어울러 태어난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둘째 관점은 세종대왕의 대외전략과 직접 연결돼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반포하는 과정에서 대외적으로 당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와 문화체제에 적극 지지를 표방하면서 내면적으로 민족적 자주성과 백성의 이익을 우선하는 균형 잡힌 실용정책을 구현했다.

세종대왕의 재위기간은 1418년부터 1450년까지다. 이 기간에 명나라는 제3대 영락제(성조), 제4대 홍희제(인종), 제5대 선덕제(선종), 제6대 정통제(영종) 등 네 황제가 차례로 등극했다. 영락제의 마지막 7년이 세종대왕의 초기와 겹치지만 이 가운데 첫 4년은 태종의 상왕 정치였기 때문에 수습기간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세종대왕의 명나라 쪽 카운터파트는 인종-선종-영종 등 3대 황제였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인종은 재위기간이 8개월에 지나지 않았고 선종이 10년, 영종이 14년 재위한 것이 세종대왕의 통치기간과 겹쳤다. 인종과 선종의 시대는 중국사에서 ‘인선의 치’라고 해서 수 문제의 ‘개황의 치’ 당 태종의 ‘정관의 치’ 현종의 ‘개원의 치’ 청 강희·건륭의 ‘강건성세’와 함께 태평성대로 기록되고 있다.

명 태조 주원장은 과거 천하무적이었던 원나라를 무찌르고 중국을 차지한 창업주로서 중국의 군사력이 가장 강한 시대를 이끌었다. 영락제 역시 다섯 번에 걸쳐 몽골을 친정하는 등 군사력은 여전히 강했다. 이런 명나라의 힘은 영종이 환관 왕진의 건의에 따라 1449년 50만 대군을 이끌고 몽골 오이라트부를 정벌하는 친정에 나섰다가 ‘토목보의 변’을 당하고 예센의 포로가 됨으로써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졌다.

이 때는 세종이 승하하기 바로 전해로 세종의 당뇨병 때문에 문종이 섭정으로 국사를 처리했던 시기다. 다시 말해, 세종 재위기간 내내 명나라의 국력은 전성시대였고 티무르가 죽은 이래 사실상 도전자가 없었던 기간이었다. 따라서 세종대왕은 명나라에 대해 지극히 신중하고 심려 깊은 외교를 벌였다. 반면 태종이 주도한 대마도 정벌과 세종대왕의 파저강 싸움 등 여진 토벌과 사군육진 개척으로 왜와 야인 등 주변 세력에 대해서는 군사적 공세와 적극 외교를 병용했다.

세종대왕의 이런 전략은 군사·외교부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문화적으로도 한때 몽골의 피정복민족에 불과했던 한족의 정통성과 수월성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인정하고 적극 수용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것이 중국문화에 대한 맹종이나 비굴을 뜻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세종은 북방 유목민족으로부터 고유 문자를 만드는 정책을 벤치마킹 했을 뿐 아니라 중국의 문물을 이 땅의 현실에 맞게 변용·개선하는 데 힘을 쏟았다. 황제국의 특권이었던 책력의 반포를 칠정산 내외편 역서의 간행으로 격을 맞췄을 뿐 아니라 천체의 위치를 계산하는 기준을 중국이 아니라 한양으로 잡아 주체성을 다잡았다. 중국의 ‘천자’만 소유할 수 있었던 시간 측정장치와 천문관측기구를 만든 것은 물론 중국에서 사라져가던 아악을 정비하고 향악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다른 두드러진 예는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다. “우리나라가 중국과 떨어져 있어, 국토에서 생산되지 않는 약물들을 구하기 어렵다. 우리의 풍속에 간간이 한 풀로써 한 병을 치료하여 효과를 많이 보았다… 이에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이 태조의 뜻을 받들어 제생원을 설치하기를 청하고 김희선을 시켜 향약을 채취하여 백성이 병을 널리 치료하게 하며 또 각 도에 의학원을 두어 교수를 보내어서 시료하게 하고…….” 조선 초기 석학 권근이 쓴 서문 내용이다.

정통 표방, 개혁 이룬 실용노선

그러나 모든 서문, 발문 가운데 발군은 역시 세종대왕이 직접 쓴 훈민정음 서문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는 세계 봉건왕조 그 어떤 황제왕공이 내린 칙유보다 명문이다. 그러면서 동국정운을 펴낼 때는 한자음을 정확하게 바로잡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한글을 창제해 민족적 자주성과 국민적 편의를 드높이면서 동국정운에서는 나라의 어음을 중국 표준과 일치시키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 양 표방했던 것이다. 세종대왕은 이렇게 볼 때 문화 보편주의와 민족 자주의식을 슬기롭게 조화시킨 군주였다. 손자병법에서 ‘정병’과 ‘기병’을 구사하듯 명분과 실익을 교차시켰다.

일부 지식인들은 조선 후기 정조가 ‘개혁군주’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조는 ‘문체반정’에서 드러나듯 개혁을 내세워 실은 보수회귀를 꾀한 ‘반동적 집권자’였다. 이에 반해 세종대왕은 정통을 내세워 개혁을 이루고자 한 ‘계몽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세종이 추구한, 보편성과 특수성이 어우러진 문화적 정통성은 우리 시대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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