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 칼럼] “나는 내 ‘천직'(Calling)을 사랑하고, 또 고맙다”

변호사는 세상의 가장 낮고 그늘진 현장을 보는 직업이었다. 다양한 세계에서 살아온 별별 사람들의 애환과 호소를 들어주었다. 때로는 그들을 부축하면서 어두운 터널을 함께 걸어주었다. 어느 날 나는 인생 산맥의 깊은 계곡 아래서 광맥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애절한 사연, 외로움과 슬픔, 억울함과 아픔, 고난 속에서의 작은 행복감 같은 것들이 청보석 홍보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나 기자들은 그런 걸 애써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무진장한 광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본문에서) 사진은 1975년 대법정에서 열린 인혁당 관련사건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모습. 반세기 전 일이다. 

내가 평생을 드나든 법정은 무대 같았다. 높은 단 위의 판사가 주역이고 검사가 조역이었다. 변호사는 순간의 장면에 등장하는 단역 같다는 느낌이었다. 내 경우는 단역이라도 어떤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법정이라는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더 희극적인 장면들이 있었다. 내가 처음 변호사를 시작한 1980년대초는 판사실이 활짝 열려있었다. 변호사들이 판사실을 찾아가 방아깨비같이 허리를 숙이며 사정했다. 돈이 든 봉투를 판사의 책상 위에 있는 법전 사이에 끼어 넣기도 했다. 변론보다 접대를 잘해야 실력있는 변호사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의뢰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자기 변호사가 판사실에 갔다왔는지 몇 번을 갔는지를 따졌다. 판사인 친구는 변호사는 판사 때문에 먹고 산다고 말하기도 했다. 법의 무대 뒤에서 악취 나는 지저분한 거래 들을 보면서 나는 짙은 회의를 느꼈었다. 수입과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지만 일에 애착을 가지지 못하고 마음이 겉돌았다. 그대로 가다간 불성실한 직업인이 될 것 같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변호사를 개업한 고위직 검사 출신은 후배들을 찾아가 헛웃음을 흘리며 사정하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했다.

한 부장판사는 법정에 갔다가 예전에 같은 방에서 근무하던 동료 판사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했다면서 아파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이 뭐였지? 라는 생각을 했었다. 판사나 검사는 아니었다. 군사법원의 판사를 해 보았다. 사형을 선고할 사건을 경험하면서 절대 판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검사직무대리로 근무해 보았다. 아침마다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여오는 사람들과 평생 싸움을 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판검사라는 직업은 다른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는 ‘완장의 맛’ 같은 당의정이 발려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자기도취와 기만에 빠질 수 있었다. 변호사는 내가 처음부터 스스로 즐겨서 택한 업은 아니었다. 환경의 길을 거쳐 내게 온 것이다. 그분이 나를 불러 이를 맡겼다고 할까. 그 부름에 순응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변호사가 아니었으면 어떤 일을 했을까.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건 분명히 아닌 것 같아 법대를 선택했었다. 아마도 변호사가 아니었다면 기자였거나 작가일 가능성이 컸을 것 같다.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하는 일을 천직으로 여기고 잘해볼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시각을 바꾸어 나의 직업을 봤다.

변호사는 세상의 가장 낮고 그늘진 현장을 보는 직업이었다. 다양한 세계에서 살아온 별별 사람들의 애환과 호소를 들어주었다. 때로는 그들을 부축하면서 어두운 터널을 함께 걸어주었다. 어느 날 나는 인생 산맥의 깊은 계곡 아래서 광맥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의 애절한 사연, 외로움과 슬픔, 억울함과 아픔, 고난 속에서의 작은 행복감 같은 것들이 청보석 홍보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나 기자들은 그런 걸 애써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무진장한 광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항상 엉뚱한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보석들을 보고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 보석들을 가공하는 기술만 익히면 변호사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가 사회적 파장을 크게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장애인의 학대를 다룬 ‘도가니’라는 영화가 폭풍이 되어 사람들을 흔들고 범인들을 가볍게 처벌한 판사들에 대해 분노가 들끓게 했다. 나는 그 재판장을 했던 판사에게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느냐고 물어봤었다. 판사는 나름의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영화를 봤더라면 중형을 선고했겠지. 그런데 내가 본 사건기록에는 그런 억울함과 눈물이 없었어. 사무적이고 기계적으로 쓴 경미한 폭행에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합의서만 붙어왔지. 내가 어떻게 그 내면의 감정들을 알았겠어?”

범죄를 글로 표현하는 형사나 검사에게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장애인의 슬픔과 막막함에 공감할 감성도 그런 것들을 묘사할 능력도 부족한 것 같았다. 변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형적이고 기계적인 문투로는 판사의 마음에 울림을 줄 수 없었다. 나는 일의 방향을 바꾸었다. 내가 만난 의뢰인의 인생과 그 내면을 글로 만들어 몇 장의 법률 서류 안에 담을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로 했다. 진정서나 탄원서를 한편의 감동적인 단편소설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상을 받고 칭찬을 받는 문학의 무대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의 열의와 기쁨으로 그 일을 하기로 했다. 품삯과는 상관없이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성취감이 생겼다.

일을 했지만 흥미가 없었을 때 일과 나는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일에 흥미를 가지고 책임을 느낄 때 나는 일을 통해서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한 눈 팔지 않고 한 가지 일에만 전념하는 장인들은 그 일에 전 생애를 걸고 있다. 보수에 넋을 팔지 않고 자신이 하는 그 일 자체에서 삶의 의미와 기쁨을 순간순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그렇게 찾았다. 그 일에 몰입하며 내 인생을 꽃피우고 싶었다.

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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