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난중일기]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
1587년 조산보 만호 이순신은 녹둔도 전투에서 패한다. 조산보는 조선시대 동북 6진 가운데 하나인 경흥진에 속하며, 동북방 주요 방어지로 경흥에서 약 16Km 떨어져 있다. 오늘날 대대장급 지휘관에 해당하는 만호 이순신은 여진족의 기습에 큰 피해를 입고 곧바로 반격을 가하지만, 패전의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한다. 상급 지휘관인 함경도 북병사(오늘날 사단장급 지휘관) 이일은 이순신이 처한 중과부적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오직 패전의 결과만 이순신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당시 이순신은 녹둔도 둔전관(국가에서 재정 확보 등을 위해 사람을 투입하여 경작한 둔전의 관리관)을 겸했다. 이 지역은 국경 너머 야인 지역과 가까워 애초부터 소수의 병력으로 여진족의 급습을 막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이순신은 수차례 이일에게 병력 증원을 요청한다. 일부에서 이일이 이순신의 건의를 묵살한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이순신에게 패전의 책임을 전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당시 방어전략인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를 이해한다면 병력 증원은 이일의 권한을 벗어나는 것이다.
한편, 이순신의 억울함을 앞장서서 해결하고자 도운 사람이 있었다. 훗날 임진왜란에서 이순신을 도운 이억기이다. 무관으로서 경흥부사와 온성부서를 지낸 터라 이순신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아울러, 당시 이순신보다 품계가 높았고, 왕족 신분이었기에 이억기의 변호는 이순신에게 큰 도움이 됐다.
10년 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두 번째 백의종군에 처해진다. 정유재란 직전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지시로 이중간첩 요시라는 경상도 우병사 김응서를 만난다. 이 때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으로 침략해 올 것이라는 첩보가 전달된다.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곧바로 부산 출정을 명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순신은 명령을 따르지 않고, 이에 임금 선조는 명령 불복종이라는 중죄를 물어 이순신을 백의종군시킨 것이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극심한 경쟁을 벌인 사이다. 이런 관계를 알고 있던 조선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첩보를 신뢰한다. 반면, 이순신은 부산 앞바다의 특성을 고려할 때 첩보의 구현 가능성을 낮게 본다. 실제로 가토 기요마사는 침공이 어려운 부산을 피하여 상대적으로 수월한 울산 앞바다로 들이닥친다.
이 사건에 대해 많은 이들은 이순신이 고니시 유키나가의 간계를 간파하고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은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이순신이 부산 출정의 명을 받은 때는 이미 왜군이 조선에 상륙한 상태였다. 즉, 변화된 상황에서 현장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출정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두 번째 백의종군에서 이억기가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도 이억기는 조정 대신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이순신의 무죄를 대변한다. 녹둔도에서와 달라진 점은 이억기가 이순신의 부하로서 진실에 대한 책임을 다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이억기는 칠천량해전에서 상관인 원균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도주할 때 최호와 함께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한다. 왕족 출신의 무관으로 마땅히 행할 바에 신의를 지키고, 사지(死地)에서도 임무에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그의 행위는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참다운 표상이다.
故 채수근 상병 순직과 관련하여 해병대 박정훈 대령의 행보가 눈에 띈다. 이 시점에서 이순신의 존재에 박정훈 대령을 대입해 본다. 그리고, 이순신에게 힘을 보태었던 이억기와 같은 존재가 누구인지도 살펴본다. 출신과 계급을 내려놓자. 어떠한 상황에서도 신의를 지키자. 지금의 선택이 진급과 훈장이 아니라 사지(死地)와 징벌이 뒤따를지언정 하늘 아래 부끄럽지 말자. 군인에게 충성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다.
“위국헌신 군인본분”(안중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