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난중일기] 힘이 있을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일본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최고 권력자, 즉 관백(?白)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층층이 쌓인 내부 불만을 열도 밖으로 돌리고자 조선 정벌을 명한다. 하지만, 하늘이 정해준 수명이 다하자, 조선을 침공했던 군사들에게 본국으로 돌아올 것을 유훈으로 남긴다.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지킬 무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단 한 명의 왜군도 철수를 원치 않았다. 노량에서 조(朝)?명(明)?왜(倭) 함대 1천여 척이 뒤엉켜 치열한 해전이 벌어진 이유이다. 이때 살아서 돌아간 무사들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西)군에 가담한 고니시 유키나카, 시마스 요시히로 등이다. 훗날 이 자들이 일본 군국주의 씨앗을 뿌린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받든 서군과 곧 펼쳐진 에도 막부의 최고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東)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열도의 패권이 달린 싸움에서 서군은 동군에게 패한다. 노량해전에서 전력(戰力) 손실을 크게 입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번에도 사쓰마번까지 퇴각하면서 목숨을 부지한다.
세월이 흘러 사쓰마번은 조슈번과 동맹을 맺고, 두 세기 이상 일본을 지배하던 에도 막부를 몰아낸다. 아울러, 일왕을 중심으로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일본을 서구식 산업국가로 탈바꿈시킨다.
익히 알려진 정한론(征韓論, 일본에 의한 조선 정벌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이 바로 조슈번에서 출생한다. 선조들이 따랐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역사상 최고의 영웅으로 내세운다. 이 자의 영향 탓에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평화를 무참히 짓밟는 군국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요시다 쇼인의 사학(私學) 기관인 쇼카손주쿠를 거쳐 간 자들이 바로 일본 군국주의의 뿌리이다. 내각과 군부를 장악한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이 대표적 예이다. 아베 신조 또한 조슈번 출신으로 요시다 쇼인을 사표(師表)로 따랐던 자이다.
난중일기와 징비록이 나온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진왜란에서 살아서 돌아간 자의 후손들이 군국주의 칼을 차고 다시 한반도를 유린한 것이다. 일제시대는 임진왜란의 다섯 배가 넘는 긴 시간이었다.
얄타회담에서 연합국은 독일과 한반도 문제에 대한 해법을 달리했다. 유럽의 평화를 위해서 전범국 독일의 힘을 빼야만 했다. 반면, 한반도에서는 우리 민족의 자강(自强)이 동북아 평화에 이바지할 것으로 판단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가 힘이 있을 때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은 반드시 망한다. 그러나 전쟁을 잊은 나라 또한 망한다.”(리델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