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구진마을 당산나무에 새겨진 800년 역사

구진마을 당산나무. 수령 800년의 느티나무는 고려시대 몽골 침입에서, 조선조 정유재란, 그리고 이인좌의 난 때 붙잡혀 처형당한 무장현감에게 붙잡혀 처형당한 박필몽(연암 박지원의 방계 조상)의 죽음도 지켜봤을 터. 2013년 11월 촬영. <사진 허정균>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 구진마을 뒷산에서 곰소만을 그윽히 내려다 보고 있는 이 느티나무는 2013년 수령이 750년이라 했으니 대략 800년 전부터 이곳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구진마을은 검모진이 있던 곳으로 예로부터 수군 주둔지였다. 유라시아를 제패한 몽고의 쿠빌라이는 1273년 4월 제주도 항파두리성을 근거로 대항하던 김통정을 끝으로 고려에서 저항군을 완전히 진압하자 일본 정벌을 명했다. 이에 곳곳에서 전함 건조를 서둘렀는데 이 때의 상황을 <고려사>에서 찾아 보았다.

원(元)이 또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 홍차구(洪茶丘)를 감독조선관 군민총관(監督造船官 軍民摠管)으로 임명하였다. 홍차구는 정월 15일에 건조 공사를 시작하자고 약정(約定)하고 공사를 매우 엄하게 독촉하자, 왕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허공(許珙)을 전주도도지휘사(全州道都指揮使)로, 우복야(右僕射) 홍녹주(洪祿遒)를 나주도지휘사(羅州道指揮使)로 임명하였으며, 또 대장군(大將軍) 나유(羅裕)를 전라도(全羅道)에, 김백균(金伯鈞)을 경상도(慶尙道)에, 박보(朴保)를 동계(東界)에, 국자사업(國子司業) 반부(潘阜)를 서해도(西海道)에, 장군(將軍) 임개(任愷)를 교주도(交州道)에 보내 각 지역의 부부사(部夫使)로 임명하고 공장(工匠)과 일꾼 30,500여 명을 징집하여 조선소(造船所)로 보내게 하였다. 이 때 길에는 역마(驛馬)가 끊이지 않고 여러 업무가 지극히 번거로웠으며, 공사 기한을 촉박하기가 마치 번개나 우레 같았으므로 백성들이 크게 고통스러워하였다. (<고려사> 1274년 1월)

조선소 자리 안내판, 2013년 11월 촬영. <사진 허정균>

이곳 검모진에서도 일본 정벌에 나설 전함을 건조했다. 마을에 조선소 자리임을 알리는 팻말이 있다. 이 나무가 750살이라면 열 살 때 배 짓는 모습을 보았을 터이다. 여몽연합군은 1274년 10월 출정했다. 또한 정유재란 때 이곳을 통해 들어온 왜군을 보았을 것이며, 이인좌의 난 때 이곳에서 무장현감에게 붙잡혀 처형당한 박필몽(연암 박지원의 방계 조상)도 보았을 것이다.

구진마을 당산나무 뒤로 곰소만이 아득히 보인다. 2013년 11월 촬영.<사진 허정균>

지난 9일 부안군 보안면 묵방산 부모님 산소를 살펴보고 변산으로 오다 느티나무 잘 있는지 보기 위해 곰소항 구진마을에 들렀다. 느티나무는 올해에도 힘겹게 잎을 피워 올리는데 성공했다.

2023년 4월 9일, 10년만에 다시 찾은 당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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