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아프’ 고은수 셰프 “초콜릿은 영혼의 음식, 비싼 만큼 특별”

삐아프

[아시아엔=나경태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신사동 가로수길. 그 거리를 살짝 비껴 들어간 한적한 골목에 수제 초콜릿 전문점 ‘삐아프’가 있다. 주변에 가게라곤 여기 하나뿐이어서 해질녘 홀로 빛을 뿜어내는 모양새가 마치 등대 같다. 가게 주인의 이력을 감안하면 터무니없는 인상평은 아니다. 적성과 다른 전공, 창업 실패, 수차례 이직을 거듭했던 고은수 대표에게 초콜릿 명장의 길을 안내했으므로.

밸런타인데이 대목을 앞둔 1월 31일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바쁘다”는 그를 삐아프에서 만났다.

삐아프 고은수 오너셰프

“초콜릿은 영혼을 위한 음식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좋은 음식이라면 값싸고 맛있고 배불러야 할 텐데 초콜릿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대신 가슴 벅찬 기쁨의 순간을 더 황홀하게, 깊은 절망의 순간엔 바닥을 딛고 일어설 수 있게 하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죠.
위안을 받기 위해 저희 가게를 찾는 손님도 많아요. 잔뜩 비에 젖은 차림으로 들어온 한 여자분이 그랬죠. 한강 다리를 서성이다가 왔다 해도 믿을 만큼 몹시 우울한 얼굴이었어요. 그런 그가 초콜릿 한 상자를 골라 선물 포장해 갖고 나가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더군요. 그 초콜릿은 분명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선물이었을 거예요. 특별한 날을 기념하거나 프러포즈를 위한 선물로 쓰이는 것은 물론이고요. 그렇게 초콜릿이 필요한 순간, 그 순간을 가장 빛나게 하는 초콜릿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삐아프의 초콜릿은 입에 넣고 즐기는 맛뿐 아니라 초콜릿을 주고받는 순간까지 고려해 제조된다. 밸런타인데이는 물론 할로윈, 빼빼로데이, 성탄절, 수능시험까지 트렌드를 잘 살린 한정판 초콜릿이 더욱 눈에 띄는 이유다.

빼빼로데이에 고은수 대표가 만든 초콜릿

수험생 선물로 제조된 초콜릿엔 ‘합격’, ‘파이팅’ 등 단순한 응원 메시지를 담는 것을 넘어 현직 수학교사와의 협업을 통해 수능 필수공식을 선정해 새긴다. 사전을 외우고 그 종이를 찢어 삼키던 학창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서울대에서 컴퓨터공학(98학번)을 전공한 그는 빼빼로데이엔 4개의 1이 사이좋게 배열된 모양에 착안, 성냥 모양 초콜릿을 출시했다. 영어로 성냥(match)은 ‘어울리다’란 뜻도 있어 썸남 혹은 썸녀에게 주는 고백 선물로 재치 만점이다. 할로윈 땐 해골 모양 초콜릿으로, 성탄절엔 초콜릿에 스노우볼을 새겨 선물 받는 이로 하여금 그날의 주인공이 된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올해 밸런타인데이엔 ‘러브레터’란 콘셉트로 한정판 초콜릿을 출시했다.

“수제 초콜릿을 처음 먹어본 건 2007년 일본을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20대 초반 IT회사 창업 후 짊어졌던 빚을 갚느라 여러 해를 보내고 요즘 말로 번아웃 상태였죠. 명품 부띠끄들이 즐비한 신주쿠 이세탄백화점을 거닐다 우연히 프랑스의 세계적인 쇼콜라티에 ‘장폴에뱅’의 부티크에 들렀는데, 제가 들어간 곳이 초콜릿 가게가 맞나 싶을 만큼 휘황찬란했어요. 아찔한 초콜릿 향기와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안락한 휴게공간에 세련된 접객 매너까지. 명품 숍 사이에 낀 초콜릿 가게가 아니라 그 자체로 명품 숍이었죠. 처음 먹어본 고급 초콜릿 맛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을 겁니다. 다만 어린 시절 즐겨 먹던 초콜릿이 이전까지의 친근함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그 무엇으로 경험됐다는 것만은 분명해요. 낯설고 신기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그 미식의 경험을 좀더 섬세하게 다듬고 좀더 가까이에서 제공해드리는 게 삐아프의 목표 중 하나입니다.”

이를 위해 고 대표는 11년차 초콜릿 셰프임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해외연수를 다녀온다. 프랑스와 일본의 초콜릿 관련 회사와 교육 기관을 찾아 최신 초콜릿 이론을 배우고 실습으로 몸에 익힌다. 꼬박 2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페루의 카카오농장을 방문하기도 했다. 2016년 블루리본어워드 올해의 패스트리셰프상을 받았다. 2013년부터 7년 동안 내리 블루리본서베이에 수록돼 출입문엔 인증마크가 촘촘히 붙어있다. 월간 파티시에, 보그, 아레나 등 다수 잡지에 소개됐고 올리브TV, 수요미식회 등 방송에도 여러 차례 출연했다.

프랑스혁명기념일에 초콜릿을 프랑스대사관에 후원했으며 한국·프랑스 식문화 비교 국제세미나에서 케이터링을 맡기도 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초콜릿 박람회 ‘살롱 뒤 쇼콜라’가 서울에서 열릴 땐 셰프로서 초청받아 시연 및 세미나를 진행한다.

“수제 초콜릿은 사치품입니다. 7g 안팎에 2000원이 훌쩍 넘으니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간식은 아니죠. 이런 고급 초콜릿만 있었다면 어린 시절 저는 초콜릿을 맛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선물로서 엄청난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디저트이기도 해요. 완벽한 외관, 정성스러운 포장, 제조과정에 담긴 스토리와 해당업체의 브랜드 이미지까지 선물의 가치에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대량생산된 초콜릿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원료를 쓰고 있어요. 고급 중식당과 동네 중국집, 짜파게티가 각자의 시장에서 제 몫을 하는 것처럼 수제 초콜릿도 대량생산 초콜릿과는 다른 나름의 역할을 한다고 인정해야죠.”

마카롱 쿠튀르

고 대표는 삐아프로 들어오는 골목 초입에 세컨드 브랜드 ‘마카롱 쿠튀르’(Macaron Couture)를 지난해 런칭했다. 한땀 한땀 정성스러운 바느질을 하듯 빚어내는 마카롱이 맞춤 의상처럼,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꼭 들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의상실을 뜻하는 프랑스어 ‘쿠튀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논현동 영동시장 한 길목을 ‘백종원 거리’라고 했던가. 삐아프·마카롱 쿠튀르로 인해 이 한적한 골목이 북적북적해진다면 조만간 ‘고은수 거리’라고 불릴 지도 모른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로4길 27-3 문의 (02)545-0317.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