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역광에 서다 “태양은 최고의 연출자”

태양이 주는 선물 가운데 역광을 어찌 감추랴

태양은 최고의 연출자

그 누가 이렇게 작은 것들을

최고의 주연으로 빛낼 수 있을까

 

눈부신 정오의 해 아래서는

존재조차 없던 작은 것들이

해 뜨는 아침이나 해질녘 그 짧은 순간에

지상의 눈부신 무대 위에서

당당한 주연의 대사를 발성한다

 

태양은 최고의 연출자

구멍 난 풀잎이건 하찮은 억새이건

가난한 소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이건

세상의 높은 무대가 아닌

역광의 낮은 무대에 그를 우뚝 세우신다

그는 저 영원에서 비추는 듯한 역광을 받아

짧은 순간 자신의 존재를 장엄하게 드러낸다

 

역광은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오는 빛인 것만 같다

아니 세상이 주는 빛을 거부하며

자기 영혼이 부르는 길을 따라

세상을 거슬러 오르는 자의 내면에서 나오는 빛,

그 치명적인 사랑의 상처에서 비춰 나오는

영원으로 가는 빛의 통로인 것만 같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