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미얀마’ 펴낸 조용경의 버킷리스트···사찰 100곳 찍기·손자와 몽골초원
조용경 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 “박태준 회장 만나 내 인생 확 바뀌어”
[아시아엔=김남주 <서울대총동창신문> 편집장]?조용경 글로벌인재경영원 이사장(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대표)가 지난 봄 출간한 <뜻밖의 미얀마>(메디치미디어)는 국내에서 출간된 미얀마 대중서 중 가장 알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6차례, 100일을 머물며 미얀마 전국을 밟은 땀내가 물씬 난다. 미얀마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전문가 수준의 사진은 신뢰를 더한다.
조 이사장의 호는 한송(寒松).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의 논어 구절에서 따왔다.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그는 ‘박태준 맨’으로 살며 YS정부 초기 지조와 안온의 갈림길에 섰다. 그는 결단코 지조를 선택하고 미국생활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한다. 조 이사장은 지금도 당시 선택을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포스코에 복귀해 인천 송도 개발을 진두지휘 했다.
인생의 뒤안길에 서서 그는 의미 있는 후반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책 출간은 그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 50대 후반, 영화 ‘버킷리스트’에 감동 받고 여생을 알찬 계획으로 채웠다. △한국 사찰 100군데 돌아보기 △들꽃사진 찍기 △결혼식 주례 100번 서기 △두 손자와 몽골 초원에 누워 밤하늘 보기….
“백수가 과로사 한다”고 블로그, SNS까지 운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조 이사장이다.
-<뜻밖의 미얀마> 반응은 어떤가.
“언론에서 좋게 평가해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런 류의 책은 잘 안 팔린다고 하는데, 출간 한달 만에 1200여 권 팔렸다고 한다. 출판사에서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미얀마와 인연은?
“처음은 비즈니스로 시작됐다. 서울대 최고지도자 인문학과정(AFP)에서 만난 분의 부탁으로 2013년 처음 미얀마를 방문했다. 일은 잘 풀리지 않았지만 당시 미얀마 풍경을 보면서 아련한 향수가 생기더라. 어릴 적 놀던 모습이 거기에 있는 거다. 가난하지만 밝은 사람들 모습에 끌렸다. 관심을 갖고 알아보니 1960년대까지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잘 살던 국가였고, 우리에게 쌀 원조도 해준 나라다. 안남미가 미얀마에서 원조한 쌀을 부르던 명칭이다. 자원도 풍부하고. 서너 번 방문하면서 ‘전생에 여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정이 들더라. 고향 사람들에게 신세를 갚아야 하는 기분으로 블로그 ‘아이러브 미얀마’를 개설했다. 미얀마를 제대로 알리는 게 우선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국내에 10여종의 미얀마 관련 책이 나와 있는데 무책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정확한 최신 정보를 주자는 생각으로 쓰게 됐다. 또 하나는 우리와 가까웠던 나라, 신세를 갚아야 하는 나라라는 것을 알려주고 미얀마 불교 이야기를 통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미얀마는 불교가 생활과 밀착된 나라다. 종교의 목적이 개인을 위로하고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라면 미얀마 불교가 그 본질에 가깝다. 미얀마는 가난한 나라지만 문맹률은 낮다. 불교 사원에서 기초 교육까지 담당한다. 스님들이 무소유의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 지위나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스님들이 탁발을 한다. 시민들의 스님에 대한 존경심이 클 수밖에 없다. 절에 들어갈 때는 절대 신발을 신어서는 안 되고, 스님 그림자는 뒤에서도 밟지 않는다. 겉으로 드러난 찬란한 불교유산도 좋지만 본질을 들여다봤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미얀마 여행 팁을 준다면.
“미얀마가 우리나라보다 크다. 처음부터 자유여행은 어렵다. 한번은 패키지여행으로 가고 다음부터 불교문화, 자연풍경 등 목적에 따라 코스를 잡으면 될 거다. 우리나라의 경주 같은 도시가 만달레이이며, 인레 호수는 신비한 풍경이 일품이다. 남쪽의 싸이티오 황금바위 사원은 미얀마인들에게 평생 한번은 꼭 가는 메카같은 곳이다. 앙코르와트와 비견될 수 있는 므라욱 우의 불교 유적들도 추천하고 싶다.”
조용경 이사장은 과거 ‘박태준맨’으로 불렸다. 박 전 총리의 국회의원 시절인 1981년 보좌관으로 인연을 맺어 자민련 총재 비서실 차장까지 지냈다. 이후 포스코건설 송도사업 본부장, 포스코엔지니어링 대표 등을 지냈다.
-서울대 법대 재학시 고시준비는 안 했나.
“재학 중에 고시 공부를 했다. 4학년 때 유신 1주년 시위가 났는데, 그날 도서관에서 공부 중 잡혀가 비인간적인 수모를 겪었다. 이런 나라에서 법률가가 되는 게 웃기는 거 아닌가. 직장은 있어야 하니까 한국은행에 입사했다. 이후 박태준 회장님을 만났다.”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생이 달라졌다고 해야 할까, 큰 그늘에서 자라다 보니 사고하는 방법이랄까. 어려운 상황에 마주쳤을 때 판단하는 방식 등을 배웠다. CEO까지 될 수 있었던 밑거름이었다고 생각한다.”
-의지대로 살아오신 삶인가?
“의지대로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고비에서는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은 나의 판단이었다. 1993년 YS 정부 초기 몇년간 험한 길이 될지 모르지만 박태준 회장을 존경했던 사람으로 그분의 재기를 돕고 억울한 것을 알리는 게 나의 일이라고 판단했다. 일생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힘든 몇년이었지만 그때 정말 바른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이후 포스코에 복귀하면서 인천 송도개발을 진두지휘했다.
“회사 내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하지만 ‘포스코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다른 업체와 기존의 땅에서 제로섬 게임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제대로 된 국토 개발에 우리가 앞장서자’ 해서 송도 개발에 나섰다. 마치 박태준 시대의 포항제철을 만든 것처럼. 박 회장님 아래서 배웠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송도에서 살기도 했는데, 평가하자면.
“당초 계획에 비하면 60, 70점? 김대중 정부 말기에 시작해 노무현 정부를 거치는 5년 동안 많은 것들이 원 계획과 달라졌다. 우리는 호랑이 그린다고 했는데 겨우 고양이를 그린 게 아닌가 싶다.”
-이력에 한송출판사를 세워 <이런 교수 떠나라>는 번역서도 출간했더라.
“박 회장님 모실 때 야인 생활이 장기화 될 것 같아 만든 출판사다. 일본에서 보고 괜찮겠다 싶어 번역을 한 책이다. 1980년대 초 일본 대학의 문제를 파헤친 책인데 지금 한국 대학에 반면교사가 될 것 같다. 교수사회의 폐쇄성, 사회에 대한 기여 부족 등을 비판한 책이다.”
-버킷리스트를 갖고 있는데, 지금 어떤 상황인가.
“주례는 54번 섰고, 사찰은 74군데를 돌아봤다 손자와 몽골 초원에서 밤하늘 보기는 내년쯤 시행하려 한다. 버킷리스트가 20여개 정도 되는데, 책 출간도 그 중 하나였다. 여기에 요즘 강연 요청도 많다보니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이해된다.”
-앞으로 계획은.
“버킷리스트 실천이다. 가장 가깝게는 한국의 아름다운 산사 40곳을 추려서 사진 중심의 에세이를 쓰는 일이다. 큰 절 중심이 아닌 힐링 의미 강하고 히스토리가 있으며 아름다운 풍경 있는 곳을 짚어준다면 젊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야생화 캘린더도 10번 만들자고 하고 돈 때문에 7번 제작하고 그만뒀는데, 후원금이라도 받아 진행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