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종교유희’인가 ‘신앙생활’인가
사사기 4장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삿 4:1)
인간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탁월한 지도자 곁에 있거나 부흥하는 공동체 속에 있을 때는 변화된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가 부재하거나, 부흥의 분위기가 사그라들면 언제 그랬냐는듯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에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입니다. 에훗이 살아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80년간이나 평화를 누렸습니다. 13명의 사사들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선물한 인물입니다.
80년 동안이나 탁월한 영적 지도자와 함께 했다면 사람들의 영적 수준이 어느정도는 됐을 법도 한데, 에훗이 죽자마자 이스라엘은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니는 동안 자신들이 뭐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납니다.
십자가 앞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실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예수님을 배신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도대체 3년 동안 그들은 뭘 했던 것일까요?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호언장담은 다 어디 갔을까요?
십자가는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산산조각나는 자리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 서는 것보다는 영적으로 고양된 느낌을 보장하는 여러 종교적 행위들 뒤에 숨는 것을 선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좋은 신앙인인 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름 있는 교회에 다니면 내 신앙도 교회의 이름값만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십자가 앞에 서 봐야 압니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예배에 빠지지도 않고, 헌금도 하고 구제와 봉사에 상당한 에너지를 쏟아도, 십자가를 맞딱뜨린 적이 없다면, 그 앞에서 내 실체에 처절하게 실망해본 적이 없다면, 내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저 교양생활이나 고상한 취미생활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