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킨슨병①] 임종까지 유머 잃지 않은 ‘아버지 부시’ 6년간 투병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보건학박사,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11월 30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조지 H. W. 부시 前 대통령의 장례식이 12월 5일 워싱턴 DC 국립대성당에서 국장(國葬)으로 엄수됐다.
장례식에는 도널드 트럼프 현 대통령을 비롯해 아들 부시와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지미 카터 등 생존해 있는 4명의 전직 대통령이 모두 참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을 내려 이날을 ‘국가 애도(哀悼)의 날’로 지정했고, 이에 따라 연방정부, 연방대법원, 연방 상하원 등은 업무를 일시 정지했다.
장례식에서 아들인 조지 W. 부시 前 대통령이 추도사(追悼辭)를 낭독하면서 ‘아버지 부시’의 일생을 회고했다. 연단에 선 아들 부시는 대통령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고인이 세상에 남긴 업적과 추억을 고스란히 전달하면서 부시家 특유의 유머 감각을 잊지 않았다. 미국인들은 유머(humor)를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생각하여 장례식에서도 유머를 빼놓지 않는다. 그는 추도사 마지막에 “아들과 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아버지였다”는 말을 하며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제41대 대통령(1989-1993)을 역임한 ‘아버지 부시’는 1924년 6월 12일 매사추세츠州 밀턴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8세의 나이로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해군 조종사로 전투에 참여해서 무공훈장을 받았다. 미국사회는 부시 전 대통령을 “더 나은 미국을 자신의 진정한 사명으로 믿었던 정치인”(뉴욕타임스)로 칭송했다. 그는 특권에 따르는 의무를 다한 와스프(WASP, 앵글로색슨계 백인 개신교) 대통령으로 불린다.
그는 1959년 미국 공화당에 입당하여 1966년 텍사스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80년 레이건 당시 대통령 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레이건 대통령 재임 8년간 부통령으로 일했다. 1988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이듬해 제4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 재임 시절, 냉전이 종식되고 독일이 통일됐으며 소련이 해체되어 미국이 초강대국 이른바 Pax Americana를 확고히 각인시켰다.
부시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한국을 두 차례 방문하여 1989년 2월과 1992년 1월 국회에서 연설했다. 당시 한국은 노태우 제13대 대통령(1988-1993)이 재임했다. ‘아버지 부시’는 1992년 재선에 실패했지만, 장남 조지 W. 부시 ‘아들 부시’를 제43대 대통령으로 키워냈다. 미국 역사상 두번째 부자(父子)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부인인 바버라 여사는 남편과 아들을 대통령으로 키워낸 ‘국민 할머니’로 미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은 파킨슨병(Parkinson’s disease)으로 운신(運身)이 어려워진 2012년경부터 휠체어와 전동(電動)스쿠터에 의지해 생활해 왔다. 또한 지난 6월에는 도우미견을 새로운 가족으로 맞아들였다.
파킨슨병은 1817년 영국인 의사 제임스 파킨슨(James Parkinson)이 손 떨림, 근육 경직, 자세 불안정 등의 특징적 양상을 보이는 환자들에게 ‘떨림 마비’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처음 알려졌다. ‘파킨슨병’은 대표적인 신경퇴행성 질환 중의 하나이며, 중뇌(中腦)에 존재하는 흑질(黑質, substantia nigra) 부분의 도파민(dopamine) 분비 신경세포의 사멸에 의해 나타난다. 도파민은 뇌의 신경세포에서 만들어지는 물질로 세포와 세포 간에 신호를 전달하는 데 이용되는 신경전달물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