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옥진씨 9일 새벽 타계···”이젠 저 세상서 병신춤 맘껏 춰 볼라네”

1인 창무극의 선구자 공옥진 선생이 9일 오전 4시49분 타계했다. 향년 81. 공 선생은 곱사춤, 병신춤, 원숭이춤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었던 시대의 광대였다. 특히 동물을 모방하는 춤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31년 전남 영광 출신으로 남도판소리 대가인 공대일 선생의 둘째 딸로 태어난 선생은 1978년 ‘병신춤’과 판소리 창이 곁들어진 ‘1인 창무극’을 선보였다. 몸을 꼬며 익살맞은 표정연기를 선보이는 병신춤은 전통무용에 해학적인 동물춤을 곁들인 공옥진 선생의 ‘트레이드마크’다.

필자가 그의 공연을 처음 본 것은 1983년 가을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린 전국순회공연 때였다. 당시 공 선생은 자신의 춤 내력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내 동생이 몸이 성치 않아 늘 울상이었거든. 걔 돌보는 게 내 몫이었어. 내가 동물 흉내 내며 온갖 시늉을 하면 그 아이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 나도 무척 좋았구.”

공 선생의 병신춤은 ‘병신’ 동생을 위해 시작된 것이다.

고인은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투병생활을 해왔으며 2004년 공연 후 왼쪽 몸이 마비돼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더욱이 2006년 가을 집을 나서다가 차에 치여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바람에 오랫동안 통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2010년 5월에야 전남 무형문화재 심청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됐다. 같은 해 9월 영광 불갑산 상사화 축제 때 문하생들과 무대에 서는 투혼을 보여 감동을 줬다. 공 선생은 걸그룹 2NE1 공민지(18)양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2009년 10월10일 전남 영광군 영광읍 교촌리 공 여사 자택을 방문했던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여사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반드시 무대에 다시 서겠다’고 하던 말씀이 귓가에 선하다”며 “만년에 몸이 불편해 제대로 전수도 못하고 가신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2010년 6월 공 선생은 국립극장에서 열린 ‘한국의 명인명무전’에서 마지막 춤사위를 선보였다. 당시 선생이 유 전 장관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려 했으나 “대선배님의 무대에서 감히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느냐”고 사양해 분장실에서 감사패를 전달했다고 한다. 유족은 딸 김은희(63)씨와 손녀 김형진(40)씨가 있다.

아래 기사는 2008년 3월1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필자의 공 선생 인터뷰다.

“교통사고 후유증…말할때마다 가쁜 숨
내 춤은 곱사춤…병신춤 비하해 화나”

1970~1980년대 배꼽이 빠질 듯한 익살과 천연덕스런 몸짓으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곱사춤의 1인자’ 공옥진(77)씨. 그가 1년6개월이 넘도록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전남 영광의 한적한 마을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재작년 가을, 집 앞을 나서다가 차에 치여 갈비뼈 3개가 부러지는 바람에 지금까지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지난 27일 낮 영광읍 ‘영광예술연수원’을 겸한 그의 자택에서 공씨는 2평 남짓 방에 누워 배에 핫백을 올려놓은 채 기자를 맞았다. 머리맡 거울엔 1995년 제자들과 공연 뒤 찍은 사진과 이곳 지역구 국회의원이 보낸 연하장이 끼어져 있었다.

그는 “어제 병원 갔다오는 길에 멍게하고 석화가 맛있어 보여 5천원어치 사다 먹었는디 탈이 났어. 몸이 예전 같지 않어”라며 담낭과 간의 담석제거 수술 자국을 보여주었다. 10여년 전엔 중풍도 맞았다고 했다. 하지만 얼굴과 손엔 주름살도 거의 없어, 10대 소녀처럼 고았다.

공씨는 숨이 가쁜 듯 기자가 말을 걸면 두 마디쯤 대답하고는 “힘들어, 이따 해” 하며 눈을 감곤 했다. 하지만 서울서 먼길을 달려온 기자한테 미안해서인지, 교통사고 때 뒷바퀴에 깔린 왼발이 지금도 쑤시다면서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로 옆 전수관으로 안내했다. 20평 남짓 공간은 ‘대한민국 최고의 춤꾼’ 공옥진의 공연 사진과 각종 의상, 기념품들로 장식돼 있었다. 그가 춤과 소리를 가르치는 곳이다.

“쩌그 붉은 천에 쓴 글씨 보이오? 93년에 중국서 받은 거신디…” 그는 중국 순회공연 때 받은 작은 휘장 선물을 무척 아끼는 듯, 사진에 담으려는데 극구 말렸다. “여그 있는 것 어떤 것도 찍지 마시오. 지금은 내가 아프고 힘든께. 담에 낫거든 다시 와 찍으쇼. 미안허요, 잉.” ‘사진촬영 불가’가 그렇게 단호하고 절실할 수가 없다.

다시 방으로 옮겨온 그는 기력만 된다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사람들은 내춤을 병신춤이라고 하는데, 그거 아니여. 곱사춤이여. 동생이 벙어리고 조카가 안팎곱사등이 병신인디, 내가 왜 병신춤을 추겄어? 그런 사람들 위로하려고 춘 건디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내 춤을 병신춤이라고 비하해서 그렇게 알려졌어, 잘못된 거시여.” 그는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분이 나고 화가 난다”고 했다.

춤 이야기가 나오자 공씨는 흥이 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마지막으로 한 공연을 기억해 냈다. “대구 지하철에서 큰 사고가 났을 때 살풀이 춤을 추었지.” 노 춤꾼의 기억은 하나둘 확장됐다. “대학생들하고 300번도 넘게 공연했어. 데모 학생들이 잡혀가면 경찰에 부탁해서 풀어주기도 많이 혔지.”

이상기 기자 winwin0625@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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