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일동의 시선] ‘심청가’ 부를 때 떠오르는 그때 그 보육원 아이

1980년대 중반 전남 한 지방의 보육원 모습. 이 사진은 뒷줄 정장차림의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 총장이 2015년 <강진일보>에 수기 형식으로 쓴 기사에 실린 것이다. 

[아시아엔=배일동 판소리 명창] 1990년대 초 남도 어느 섬의 보육원으로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다. 아직도 그날의 광경이 생생하다. 배를 타고 한 시간쯤 들어가자 아름다운 섬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보육원 아이들이 나루터로 마중 나와 있었다. 보육원은 야트막한 산비탈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꽤 많았다. 한쪽에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모여서 경운기를 손질하고 있었고, 또 다른 쪽에선 어린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놀고 있었다.

보육원 원장이 말하길, 이곳은 다섯 살 어린아이부터 고3까지 부모 잃은 아이들이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사정도 여의치 않고, 아이들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서 허드렛일을 아이들이 도맡아 한다고 했다. 우리 일행은 이런저런 일을 거들어주고 판소리 공연을 가졌다. 나는 <심청가> 중에서 ‘심 봉사가 아이 달래는 대목’을 불렀다.

“이리 주소 어디 보세/ 종종 와서 젖좀 주소/ 귀덕이네는 건너가고/ 아이 안고 자탄헐제/ 강보에 싸인 자식은/ 배가 고파 울음을 우니/ 심 봉사 기가 막혀/ 아이고 내 새끼야/ 너희 모친 먼디 갔다/ 낙양동촌 이화정의/ 숙낭자를 보러 갔다/ 죽상제루 오신 혼백/ 이비 보러 갔다/ 가는 날은 안다마는/ 오마는 날은 모르겠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너도 너희 모친/ 죽은 줄을 알고 우느냐/ 배가 고파 우느냐/ 강목수생이로구나.”

하필이면 왜 이 대목을 가뜩이나 서러운 처지의 아이들 앞에서 불렀는지, 나도 노래 중간쯤에 목이 막혀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애써 울음을 안 보이려 해도 감은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말았다. 소리하는 도중에 보니 어떤 아이들은 벌써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가슴이 왈칵거려 도저히 소리를 부를 수 없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간신히 소리를 마쳤다.

소리판이 끝나고 그 슬픈 감정을 안은 채 잠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 뜰 앞을 서성거리고 있는데, 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 녀석이 곁에 오더니, 며칠 새 내린 비로 웅덩이에 고여 있던 황톳물을 나에게 물장구 치고 저만치 도망가는 게 아닌가. 그때는 내가 한복 생활을 하던 때라 그날도 무명으로 지은 새하얀 두루마기 바지저고리를 입었는데, 흙탕물로 옷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래놓고 도망치는 그 녀석을 곧장 따라가 잡았는데, 똘망똘망한 눈가에 눈물이 축축해 있었다. 그걸 보고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던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보듬고 말았다. 꼬마는 아무 말 없이 한참 있다가 그 자리를 떴다. 꼬마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왜 그리 사람을 슬프게 울리냐’는 듯한 소리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떠나올 때 그 녀석을 찾아보니 마당에는 안 보이고 방에서 창문 너머로 우리를 환송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비록 나이가 어렸어도 <심청가> 가사와 자기 처지가 비슷하여 울었을 것이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너도 너희 모친이 죽은 줄을 알고 우느냐” 하고 통곡하는 심 봉사의 애틋하고 서러운 정황이 그 아이에겐 가슴에 사무쳐왔을 것이다. 비단 그 아이뿐만 아니라 그날 그 판에 함께했던 사람들이 모두 그랬을 것이다. 소리 속의 이심전심으로 동병상련의 애틋함을 느꼈을 것이다.

인생은 너나 할 것 없이 짠하다. 판소리는 바로 이러한 감동이 있는 예술이다.

배일동 명창의 <심청가> 중 ‘심 봉사 눈 뜨는 장면’ 판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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