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한중 사드갈등 외교부가 자초했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이명박 대통령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 바로 하루 전에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며 다짜고짜 쳐들어왔다. 한국에서는 성남기지를 비워 놓고 기다렸다가 대통령과의 면담을 성사시켰다. 이것은 비유를 하자면 청나라 때의 삼궤구고(三?九叩)와 다를 바 없다. 원세개가 국왕을 보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엇인가? 아무리 외교를 잘 모르고 실용을 중시하는 비즈니스 출신의 대통령이지만 이러한 황당한 요구는 일축했어야 했다. 더구나 평생을 외교부문에서 뼈가 굵은 외교부장관이나 외교안보수석은 대통령을 제대로 보좌했어야 했다.

외교에서 의전은 형식이 아니라 속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중간에 군사외교가 개시될 때 중국에서 외사판공실장 나빈(羅賓) 소장이 왔다. 별 하나였다. 우리는 3성 장군인 정책실장이 대응했다. 중국 국방부에는 참모조직은 외사판공실이 주무고 나머지는 모두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 등에 속해 있다. 우리는 3성의 정책실장보다는 2성의 정책기획관이 상대하였으면 제격이었지만, 국방부의 업무체계로 볼 때 중국 외사판공실장을 우리 정책실장이 상대한 것이 크게 과도한 것은 아니었다.

한소 군사외교가 시작될 때 소련에서 제1국방부차관이 왔다. 당시 소련 국방부에는 장관 밑에 3명의 제1차관이 있었는데 제1차관이 우리의 차관에 해당하고 총참모장도 제1차관 중의 하나였고 소련에서 제1차관이 온 것을 우리 국방부 차관이 상대한 것은 모양새가 맞았다.

한미관계에서는 다르다. 미국에서는 Deputy Assistant Secretary가 온다. 캠벨이나 로리스 등이다. 이것을 우리는 이를 직역하여 부차관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미 국방부의 조직과 우리 국방부 조직을 비교해보면 Deputy Assistant Secretary는 국장 밑의 심의관에 해당한다. 우리의 정책실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미국의 Under-Secretary for Policy가 있다. 미국 국방부에는 4명의 Under-Secretary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구했을 때 그처럼 쉽게 이루어지리라고는 중국도 생각을 안 했을 것이다. 어떻게 되나 해서 찔러보니 한국측에서 부랴부랴 조치를 해서 성사가 됐다. “한국은 이렇게 다루어도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여도 말이 안 되는 것인데 이 역시 성사가 되었다. 중국이 한국을 넘보는 버릇은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사드에 대한 중국의 황당한 요구는 우리 외교팀들이 자초한 면이 크다.

2006년 노무현 대통령 당시 한국과 미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였다. 한국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인정하고, 미국은 한국민의 의지에 반해서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군사변혁의 성과를 활용하여 세계적 유동군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고, 한국은 이를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중국으로 볼 때 이는 지금의 사드문제보다 훨씬 심각했으나 이를 수용한 한국에 대해서 중국은 별로 항의를 안했다. 한미동맹의 견결(堅決)함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중국이기 때문이었다.

연미화중(聯美和中), 어떻게 끌어나갈 것인가는 모두 우리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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