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과 영화 ‘동주’②] 윤동주 역 강하늘 “시나리오 보고 눈물 흘린 건 처음”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다. 윤동주는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소학교 동기동창으로 윤동주 집에서 석달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 문재린 목사의 아들 문익환 등이 있었다. 1932년 윤동주는 송몽규, 문익환 등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에서 운영하는 미션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냈다.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 등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냈다. 1938년 2월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윤동주는 조선어 강의(최현배 교수)와 역사 강의(손진태 교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 문학 강의(이양하 교수)를 들으며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에서의 4년간은 그의 시 세계가 영글어간 시기였으며, 또한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뜨는 과정이었다. 졸업을 앞둔 1941년 11월 윤동주는 그때까지 써놓은 시 중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윤동주는 문학에 뜻을 두고 있는 문학청년으로서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날 때까지도 문학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그의 막역한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는 문학보다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믿어 중국의 임시정부를 찾는 한편, 일본에 유학중인 조선 학생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계획한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인하여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인 도쿄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하였으며, 함께 일본에 온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사학과에 입학하였다. 윤동주는 유학 초기 향수병에 시달려 그해 10월에 송몽규가 있는 코토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인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입학을 했다.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과 함께 ‘사상불온ㆍ독립운동ㆍ서구사상 농후’ 등의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윤동주는 징역 2년형(刑), 송몽규는 2년6개월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死因)으로, 송몽규 또한 3월 7일에 옥중 순국하였다. 일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세균 실험을 실시했는데, 윤동주와 송몽규도 바로 그 실험에 이용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윤동주 장례는 3월 어느 눈보라 치던 날에 치러져서 중국 용정의 동산교회 묘지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영화 속에서 소개되는 시들은 만들어진 배경을 묘사하기 때문에 시대 상황을 투영하고 있으며, 개인과 시대의 비극을 보다 극적으로 느낄 수 있다. 영화 <동주>는 충분한 자본으로 제작하는 상업영화와 다른 면이 많아 관객들에게 생경(生硬)하기도 하지만 난해하게 다가가지는 않는다.
윤동주 역을 맡은 배우 강하늘은 “지금껏 시나리오를 보고 눈물을 흘린 건 <동주>가 처음이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울렁이는 감정을 느낀 것이다. 또한 윤동주 시인 앞에 ‘흔들림’이라는 수식을 붙이고 싶다고 한 이유는 윤동주의 청춘은 굉장히 뜨겁고 푸르렀기 때문에 흔들린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