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9일] 한국의 문자 ‘한글’이 공표된 날

2009년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서 제막

2009년 10월9일 오전 9시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앞 광화문광장에서 한국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의 동상이 세워졌다. 이명박 대통령과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을 비롯한 각계 요인들은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을 열었다.

동상은 높이 6.2m, 폭 4.3m에 무게 20t 규모로, 이순신 장군 동상 뒤쪽으로 약 210m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동상은 김영원 홍익대 교수가 만들었다. 왼손에 ‘훈민정음 해례본’을 펴서 들고 오른손은 가볍게 올린 형태의 좌상(坐像)으로, 훈민정음을 온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쓰도록 장려한 대왕의 온화한 모습을 형상화했다. 동상 주변에는 해시계, 측우기, 혼천의 등 대왕의 업적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한 각종 조형물도 설치됐다.

2005년 10월9일 한글날에는 세종대왕 친필이 최초로 발견됐다. 한국 서지학계 원로인 천혜봉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소개한 <세종대왕 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문>이란 문서가 그것이다. 세종 즉위 7년인 1425년 4월 세종대왕이 가뭄이 극심해 기우제를 지낸 뒤 형 효령대군이 있던 ‘합강정’을 방문했을 때 쓴 글이다.

이 글은 형님과 힘든 백성을 걱정하던 중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이는 어진 형님의 덕이라고 적고 있고, 비가 와서 기쁘다고 해서 ‘합강정’을 ‘희우정(喜雨亭)’이라고 하고 있다. 가로, 세로 2~3㎝ 크기의 해서체로 썼으며 모두 10장으로 구성됐다.

1968년 10월9일 당시 세종대왕 동상은 서울 시청 앞 덕수궁 앞에 있었다. 이곳에서 12개 대학교 국어운동학생회 대표들로 구성된 전국국어운동대학생연합회 임원들이 모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추모하고, 국어운동 결의를 새롭게 하기 위해 세종대왕 영전에 꽃다발을 바쳤다. 연례행사로 마련한 세종대왕 동상 헌화식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957년 10월9일에는 한글학회가 사전편찬에 착수한지 30년 만에 마지막 6권을 출간, ‘우리말 큰사전’이 완간됐다. 한국 민족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1927년 ‘조선어사전’ 편찬 논의가 시작돼 1929년 10월31일 이극로ㆍ이윤재ㆍ최현배 등 108명이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를 구성한 것이 ‘우리말 큰 사전’ 완간의 밑거름이 됐다.

1936년 3월에는 사전편찬작업을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에서 ‘조선어학회’로 이관, 3년 목표로 사전편찬작업을 시작했다. 16만 단어의 초고가 거의 완성될 무렵인 1942년 10월 일본 경찰이 서울의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급습하는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해 사전원고를 모두 압수당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8일 사전원고가 서울역 운송창고에서 발견돼 편찬 작업이 재개됐다. 마침내 사전 제1권과 제2권이 1947년 10월9일과 1949년 5월5일에 각각 출간됐다. 마지막 6권은 제1권이 나온 지 정확히 10년 9개월 만인 1957년 10월9일 마무리됐다.

1446년 10월9일 조선 4대 국왕 세종은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어를 표기할 문자인 한글을 발표했다. 훈민정음은 당초 1443년에 만들어졌다. 3년 간 시험 기간을 거친 뒤 1446년에 반포한 것이다.

한글 창제 당시에는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훈민정음>이라 했고, 줄여서 ‘정음(正音)’이라 불렀다. 남북 및 해외 한인 학자들 간에 합의로 국제표준화기구(ISO)에는 이 ‘정음(Jeongeum)’이라는 말로 등록돼 있다. 세종이 발표한 <훈민정음(해례본)>은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돼 있다. 한글 자체는 등록돼 있지 않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2009년 10월9일 낮 12시(현지시각)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토르비에른 야글란 심사위원장이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일부 언론들은 1901년 시작된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가운데 세계를 가장 놀라게 한 발표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전 세계의 큰 기대를 안고 취임했지만 취임 1년도 안 된 대통령에게 인류 최고로 영예로운 상을 수상한 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냉전 붕괴 이후 진행되던 미국의 단일패권주의라는 국제질서를 되돌려놓고 있다는 판단이 많았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상징성도 작용했다. 핵무기 없는 세상이란 ‘담대한’이상을 제시하며 핵 군축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교착상태에 빠진 중동평화회담 재개, 이슬람 세계와의 화해, 전 지구적 기후변화 대응 등을 역설해 미국인들 뿐 아니라 지구촌 여러 곳에서 지지를 받았다.

미국 현직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1906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과 1919년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에 이어 3번째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뒤인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에게는 1000만 크로네(140만 달러, 한국 돈 약 16억80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되는데, 오바마 대통령은 상금 전액을 10개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1989년 한국 남극조약 자문회원국

1989년 10월9일 한국이 ‘남극조약’의 자문 회원국이 됐다.

남극 조약은 1959년 12월1일 맺어져 1961년 6월23일부터 그 효력을 발휘했다. 1957년과 1958년의 ‘국제지구관측의 해’를 맞아 남극에서 활동 중인 12개 나라를 미국이 초청한 회의에서 조약이 논의됐다.

남한은 1986년 11월28일 33번째로 조약에 가입했고, 북한은 1987년 1월21일 35번째로 ‘남극조약’에 가입했다.

1983년 버마 아웅산 묘소 폭발사건

1983년 10월9일 당시 한국의 전두환 대통령은 동남아시아와 대양주 6개국을 순방하던 중 첫 방문지인 버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사건이 일어났다. 대통령을 수행하던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등 17명이 순직하고 15명이 부상했다.

폭발물이 터지는 순간 아웅산 묘소로 향하던 중이어서 가까스로 화를 면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남은 순방계획을 모두 취소, 즉시 귀국해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하고 북한의 새로운 도발에 대비하기 위해 전군(全軍)에 비상태세를 지시했다.

버마 당국의 수사결과 이 사건은 북한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은 북한군 정찰국 특공대 소속 진모(某) 소좌,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버마 정부는 이 사건의 수사를 매듭지으면서 11월4일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양곤에 있는 북한대사관 직원들의 국외추방을 명령했다. 양곤지구 인민법원 제8 특별재판부는 사건 두달 뒤인 12월9일 테러범들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으로 코스타리카·코모로·서사모아 등 3개국이 북한과 외교를 단절했고, 지구촌 69개나라가 대북한 규탄성명을 발표했다.

1967년 체 게바라 사망

1967년 10월9일 아르헨티나 출신의 혁명가 체게바라(Che Guevara, Ernesto)가 39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체는 하루 전인 10월8일 볼리비아의 산악지대 ‘라 이게라(La Higuera)’에서 반정부 게릴라들을 이끌고 순찰활동을 벌이다 볼리비아 특수부대원들에게 포위당했다.

게바라는 볼리비아군과 교전을 벌이다 다리에 부상을 입고 자신이 쓰던 총도 망가지자 항복했다. 볼리비아군은 게바라를 잡은 지 하루 만인 10월9일 바리엔토스(Barrientos) 볼리비아 대통령의 명령에 따라 그를 사살했다.

체 게바라는 고국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의대를 졸업한 뒤 과테말라와 볼리비아를 거쳐 1955년 쿠바에 갔다. 쿠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의기투합해 쿠바혁명에 참가했고 카스트로가 쿠바 정권을 장악하자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며 ‘쿠바의 두뇌’ 노릇을 했다. 그러나 1965년 새로운 혁명을 이끌기 위해 볼리비아로 건너갔다가 2년 만에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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