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담유 저 ‘에디터의 일’···”데이터시대, 스스로 길을 만든다”

[아시아엔=김지혜 출판사 나무와달 대표] 책은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해낸 가장 창의적인 도구이자 가장 오래된 매체다. 그러나 영상매체가 보편화되고 디지털 콘텐츠가 쏟아지면서 책이 누리던 지위는 예전 같지 않다. 출판업계는 해마다 전례 없는 불황이라며 울상 짓고, 두껍고 무겁고 비싼 종이책을 선호하는 독자는 갈수록 줄어든다. 쓰는 이들이 읽고, 읽는 이들이 쓰며 내부로만 순환하는 출판생태계도 한계가 보인다.

기이하게도 이런 시절에 에디터들의 에세이가 쏟아지고 있다. 출판산업이 처한 여러 위기에 직면하여 현장에서 고투하는 주체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거니와,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내주던 출판담론을 직접 챙기면서 산업의 미래를 모색하고 출로를 찾는 모습은 자체로 긍정적이다. 아울러 우리 사회의 중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출판인들이 수행해온 지식인이자 문화인으로서의 역할을 내부자들의 경험 서사를 통해 복합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중 김담유의 <에디터의 일>(스리체어스, 2023)은 25년 경력의 출판 편집자가 쓴 직업 에세이로 대중이 생각하는 에디터의 정체성을 반문하면서 포문을 연다. 에디터란 단순히 저자가 쓴 글을 교정하고 윤문하는 사람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담유에 따르면 디지털 초연결사회에서 에디터는 말과 글을 업으로 삼는 ‘지적 생활자’이자 ‘대화 중독자’이며 사람과 사람, 세상과 세상을 잇는 ‘섬세한 연결자’다. 아울러 종이책 기반의 출판업은 축소될지 몰라도 콘텐츠 플랫폼으로서 퍼블리싱(publishing)과 그것의 주체인 에디터는 약화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고 전망한다. 오히려 정보 구성과 지식 전달에 있어서 요구되는 역할이 더 많아졌고, 저자와 독자를 연결해 널리 알리는 출판 본연의 일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에디팅(editing)의 핵이 되었다는 것이다.

에디터의 역할과 지식 출판업의 미래에 대해 이렇듯 낙관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고로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빅데이터시대다. 지식이 ‘한 권’이라는 형태로 분류되고 정리되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귀족과 엘리트의 서가에서 한정적으로 독점되고 대물림되던 지식은 이제 디지털 기술문화에 힘입어 온라인에 접속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사용하고 공유할 수 있다. 모두가 지식인이자 문화인이며, 누구라도 저자가 될 수 있다. 세계가 평평해지고 있다는,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말처럼 갈수록 지식이 평준화되고 하향화되는 ‘평범한’ 세상이다.

김담유가 주목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출판하여 널리 알릴만한 글과 저자를 발견하고 감별하던 에디터의 전통적인 덕목이 오히려 긴요해진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가라지들 사이에서 밀이삭을 발견하는 베테랑 농부처럼 가치 있는 지식과 잠재력 있는 존재를 감별하고 매칭하는 에디터 본연의 역할은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자질일 수밖에 없다.

책을 통해서만 에디터의 역할이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지식과 정보, 문화와 경험을 다루는 곳이라면 어디든 에디팅, 편집적 기능을 필요로 한다. 에디터의 직무가 이런 본질을 내장하고 있음을 통찰한다면 디지털 기술문화가 불러오는 위기 국면이 두렵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에디터의 일>은 오늘날 출판업과 그 업의 중심축인 에디터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하면서 미래의 에디터가 나아갈 바를 명징하게 직시하도록 돕는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에디터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욕망, 감별, 연결, 노동이라는 네 가지 테마 아래 25년간 도서 편집 현장에서 체득한 노하우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따라서 이 책을 편집 실무 매뉴얼로 접근하면 다소 곤란하다.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프로세스를 거치는지 그 제작 현장을 자세히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은 별 소용이 없다. 그러나 책이라는 무대가 어떻게 설계되고 그 무대 위에서 저자는 어떻게 세계를 발화하는 주인공이 되는지, 이 모든 일을 기획하고 주관하는 에디터는 왜 스스로 자리를 지우며 매개체 역할에 집중하는지 등, 지식과 정보가 ‘한 권’의 형태로 담겨 독자-출판시장에 나아가는 원리를 이해하도록 돕는다.

김담유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에디터의 일>은 책 만드는 에디터들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책이자, 이 일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이들이 갖춰야 할 덕목과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책이에요. 과거의 저는 저자의 수행원이자 출판사의 대리인으로 일했어요. 강력한 두 주체 사이에 끼어 납작한 모습이었죠. 이 일을 오래 지속하려면 나의 일에 관해 좀 더 입체적인 담론을 형성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자의 글을 다듬어 책으로 완성하는 일을 넘어서 사람과 세상을 연결하는 일, 판을 바꾸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까지를 에디터의 일로 보았습니다.”(‘에디터는 스스로 미래를 만든다’, <아트인사이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65991)

오늘날 출판업과 에디터는 생존적 기로에 서 있다. 매체환경이 바뀌고 사용자(독자)들의 활자 경험 루틴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이 업에 몸담고 있는 주체들은 과연 산업의 존폐 여부를 앞두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자본과 시장을 추수하는 경향을 탓할 수만은 없다. 책은 문화이면서 산업의 산물로서 언제나 양가적 의미를 띄고 인류 문화의 첨단에 놓여 있었다. 그 지위와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해서 기능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처럼 오히려 몇몇 책은 한국사회의 폐단을 예리하고도 창의적으로 재현하며 대중의 공감을 끌어낸다. 평범한 언어로 비범한 통찰을 드러내는 이런 주제, 이런 저자, 이런 작품을 찾아 출판을 넘어선 영토를 찾고 확장하는 일이 에디터에게 남겨진 궁극의 소임인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제 일의 미래가 외부에서,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인 줄 알았어요. <에디터의 일>을 쓰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이 일을 멈추지 않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았죠. 그냥 작은 깨우침일 뿐인데 심리적으로 상당히 안정되고 마음의 중심이 확고해졌어요. 설령 제가 굼벵이 걸음으로 10미터밖에 못 간다고 해도 누군가 그 길을 이어서 걸을 테지요. 그걸 믿고 저는 제가 갈 수 있는 만큼만 가면 돼요. 저만의 호흡으로, 천천히, 즐기면서. 이것이 자본주의의 속도를 이기는 유일한 길 같아요. 자기 호흡, 자기 루트.”(앞 인터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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