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이스라엘이 중동에 쌓아올린 40여년의 ‘거짓된 평화’

[아시아엔=아시라프 달리 아시아기자협회 회장] 1977년 11월 9일,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사다트.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 국회 앞에서 평화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겠다고 표명해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 발표는 사실 미국과 사전에 입을 맞춘 준비된 계획이었다. 곧이어 이스라엘 정부는 주 이집트 미국 대사를 통해 사다트 대통령을 국회연설에 초대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은 이집트가 중대한 전환기를 맞이할 것임을 전세계에 알린 사건이었다. 사다트의 이러한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기인했다. 첫째, 이집트는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나토 회원국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했다. 둘째, 아랍권 공동의 이익보다 자국의 이익을 좇아야 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셋째,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사례를 본 다른 아랍국가들도 팔레스타인 문제를 비롯한 다른 현안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대화하는 계기를 갖길 바랐다.

1978년 9월 5일, 사다트와 이스라엘 총리는 각자가 구상했던 협상안을 품고 데이비드 캠프에 모였다. 회담 장소엔 13일간의 긴장이 흘렀으나, 결국 극적인 타결을 맞이했다. 중동의 평화를 바랐던 중재자 카터의 추진력이 이 협정이 맺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협정은 마침내 체결되었으나 중동의 정치 지형도는 새로운 장을 맞이했다. 아랍국가들이 이집트와의 단교를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사다트가 마음 속으로 그려왔던 ‘평화’는 실현되지 않았다.

이집트 권력층과 국민들도 이스라엘의 표준화를 따르게 된 것에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967년 전후 이스라엘이 저지른 만행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또한 1973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거둔 승리가 사다트 대통령의 ‘거짓된 평화’로 퇴색돼 버렸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자유주의 진영과 호흡을 맞춰온 사다트는 소비에트연방 지지자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사다트는 급진적인 이슬람신도들을 풀어놓으면 마르크스주의자 파벌들을 몰아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지만 이는 그에게 처참한 결말을 가져다 줬다. 급진주의자들이 1973년 전쟁 승리를 기리면서 1981년 10월 6일 사다트를 암살하고야 말았다.

뒤를 이은 호스니 무바라크는 전임자의 발자취를 따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후임자는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활동했던 이슬람 급진세력과 마주해야 했다. 탈레반, 알카에다, 그리고 ISIS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군대 급의 통솔력을 지니게 됐다. 현재 이슬람 급진세력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이집트 시나이 등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에 나서고 있는 세계 많은 국가들은 테러 척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지만 여기에는 한계가 있다. 테러집단과 맞서는 두 개의 중심축 나토와 아랍국가들에서도 테러가 여전히 자행되고 있으며, 이는 또다른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테러집단을 지원해온 카이로의 무슬림형제단이 추락한 후, 이집트는 테러 세력을 근절하기 위해 시나이에 군대를 투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 또한 발생했다. 최근 뉴욕타임즈는 “이집트가 테러를 멈추기 어려워 보인다. 국경 너머의 위협에 방관해 왔던 이스라엘조차 지난 2년간 이집트를 비밀리에 100여 차례 공습했다”고 보도했다. 이 와중에 이스라엘 측은 엘 시시 대통령의 승인 하에 공습을 감행했다고 밝혔지만, 이집트 측은 이를 부인하며 진실공방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거짓된 평화’의 시대가 지난 지 40여 년, 지금도 오래 묵은 적들은 그 자리에서 전쟁의 환상과 싸우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수십 년간 평화는 없었다. 그 후유증으로 인한 전쟁의 승자 역시 없다. 군수공장들을 살찌우는 전쟁의 환상이 계속되는 한, 그리고 저 멀리 강대국 의사결정자들의 그릇된 판단이 계속되는 한 달라질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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