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문화대국의 노벨문학상 한강과 ‘순수문학 논쟁’
한국의 소설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됐다는 보도가 연일 나오고 있다. 대한민국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 같다. 자동차와 반도체를 수출해도 그 나라의 문학을 인정받고 소설을 팔 수 있어야 문화 대국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 물꼬가 튼 것이다.
아마 내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소설 <설국>의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서점 매대에는 온통 <설국>이 깔려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사서 읽고 화가 났다. 스토리도 없고 당연히 재미도 없었다. 도대체 이런 작품이 왜 노벨문학상을 받았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10년쯤 후에야 그 작품의 진가를 알았다. 작품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영롱한 보석 같다는 걸 비로소 느꼈다. 어떻게 인간의 언어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고 감탄했다. 나는 그 작품을 읽고 또 읽고 문장들을 공책에 써놓았다.
작가는 그 작품을 쓰고 10년에 걸쳐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는 작업을 했다는 얘기를 어느 글에선가 읽었다. 보석세공사처럼 언어를 정교하게 연마하고 조립하는 존재가 작가인 것 같다. 낮은 수준이었던 나는 그 아름다운 문장들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 다음부터 나는 노벨문학상을 탄 작품들을 진지하게 읽었다. <파리 대왕>을 감명 깊게 읽었고 <고요한 돈강>에서 받은 감동이 아직도 내면의 호수에서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톨스토이가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변호사로 살아왔지만 법률가들 보다는 좋은 소설가들과 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찾아가서 인연을 맺고 그들의 얘기를 듣곤 했다. 이문열, 김훈, 김홍신, 정을병, 백시종 등 여러 원로 소설가들을 만났다. 또 그들의 다음 세대인 작가들을 만나 문학에 대해 경청하기도 했다.
이번에 노벨문학상을 탄 한강이라는 소설가는 나이 상으로 그 다음 세대쯤 되지 않을까. 평범한 시민인 나는 그저 재미있는 대중소설을 좋아했다. 그런데 가끔 문학지를 보면 순수문학이라고 하는 작품들이 있었다. 뭔가 인간존재의 본질을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 같은데 난해했다.
20년 전쯤 소설가 윤대녕, 천명관씨가 열 명 정도의 독자들과 문학 토론을 하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독자라는 40대 남자가 질문을 했다.
“한국 소설들은 너무 어렵게 쓰는데 대중이 알기 쉽도록 쓰면 안 될까요? 이상문학상을 탄 작품이라고 해서 읽어보았는데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 말에 옆에 있던 대학생 같아 보이는 독자가 끼어들었다.
“저는 다 이해가 가던데 이상하네요?”
그는 문학적 천재일까? 순수문학이라는 쟝르에 이해를 요구하는 어떤 스토리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추상화를 즐기듯 문장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일까 나는 의문이었다.
그 질문에 대해 소설가 천명관씨가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순수문학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김진명씨나 이원호씨 또는 <아버지>나 <가시나무새>를 쓴 분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소설을 쓰는 그들과 순수문학은 다르다는 의미 같았다. 문학 안에서도 귀족과 평민이 나뉘는 것 같은 느낌의 말이었다.
“소설이란 그래도 스토리를 대중들에게 쉽게 말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요?”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독자가 물었다. 그 질문에 이번에는 소설가 윤대녕씨가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는 소설이란 대중에게 던지는 하나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스토리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근원에 대해, 삶에 대해 탐구하는 겁니다. 그래서 문학이라고 배울 ‘학’ 자를 쓰는 겁니다.”
같은 소설이라는 단어를 써도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문학이라고 해서 스토리가 없고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소설을 쓰니까 외면받고 소설가들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는 건 아닙니까?”
그곳에 있던 또 다른 독자가 질문했다.
그 말에 윤대녕씨가 이렇게 대답했다.
“소설가들을 가난하게 보시는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결코 얼마가 되지 않습니다. 제 경우도 좁은 방에 책상과 걸상밖에 없습니다. 책도 읽고는 전부 기증해 버립니다.”
순수문학을 한다는 작가들의 정신세계를 약간 알 것 같았다. 그들이 가진 내면의 잣대와 사용하는 언어가 다른 것 같았다. 세상과는 얼마간 거리를 둔 사람들 같았다. 보통 사람인 독자들과 서로 다른 외국어를 하면서 소통하지 못하는 것 같은 작은 토론회였다.
토론회가 끝난 후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여성독자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순수문학을 한다는 분들을 보니까 자기들이 만든 틀 안에 박혀 사는 것 같군요. 마음을 열어놓지도 않고 세상 체험도 없이 관념적인 어휘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려는 것 같아보여요.”
그녀의 생각인 것 같았다. 당시 나의 인식 속 문학계는 좁다란 독 안에 끼리끼리 모여 오골거리며 칭찬해주기도 하고 헐뜯기도 하는, 대중과는 분리된 다른 사회인 것 같았다. 순수와 대중의 구별을 넘어 통합된 작품세계가 나오고 그런 소설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런 시대가 온 것 같다. 좁은 독 안에 갇혀있던 한국의 문학이 그 독을 깨고 세계로 눈을 돌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