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만

대중음악 평론가, DP바이오팜 대표이사
  • 1970년대 ‘새마을노래’···”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

    [아시아엔=김세만 대중음악칼럼니스트] 4.19혁명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많은 댓가를 치르고 나서 가능한지 생생하게 보여줬다.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희생으로 얻은 민주주의는 불과 1년 뒤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거꾸로 원위치되고 말았다. 파벌과 무능 무책임으로 세월만 ‘죽이는’ 민주당 정권을 대신해 들어선 박정희 군사정부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외쳤다. 1967년 연임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4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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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년 4.19 ‘유석애도가’···”설움어린 신문들고 백성들이 울고있네”

    [아시아엔=김세만 대중음악칼럼니스트] “배고파 못살겠다. 죽기 전에 갈아보자”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과 건국에는 공을 세웠지만 국민들의 허기를 채우는 데는 실패했다. 게다가 장기집권과 관료들의 부패는 의분에 찬 학생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1960년 3월15일 정부통령 부정선거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마산에서 학생과 시민 규탄대회가 열렸다. 4월12일 마산상고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처참하게 떠오르고 이어 4월18일 고려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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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쟁시기 ‘전우여 잘 자라’···”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아시아엔=김세만 대중음악칼럼니스트] 타의에 의해 이룬 광복은 정치혼란과 사회불안으로 해방의 꿈을 만끽하지도 못한 채 민족 최대비극인 6·25전쟁으로 이어졌다. 외세 영향으로 남과 북으로 국토가 나뉘는 설움을 또 한 번 겪어야 했다. 그 갈등은 지금껏 하나가 되지 못한 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한국전쟁 때 가장 많이 불리운 노래가 바로 <전우여 잘 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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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만의 대중음악 산책] 1945년 ‘조선의 노래’···”길러온 재주·힘 모아 삼천리 강산을”

    [아시아엔=김세만 대중음악칼럼니스트] 외세의 영향을 받아 한시도 편안한 날이 없던 한반도에 1945년 8월15일 해방이 찾아왔다. 삼천리 8도강산은 물론 만주벌판을 중심으로 중국대륙과 이름도 낯선 블라디보스톡과 바다 건너 하와이 등 해외에서 투쟁해온 독립투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넋의 댓가였다. 위안부 할머니, 징병과 징용 등으로 흩어졌던 가족들이 잠시나마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1945년 8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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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만의 대중음악 산책] 1919년 ‘광복가’···”2천만 동포야 총칼 잡고 일어나거라”

    [아시아엔=김세만 대중음악칼럼니스트] 1910년대 <학도가>가 거리에서 민중의 독립운동을 갈망하며 국민가요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메아리칠 때 일제는 탄압의 강도를 더 높여갔다. 그러나 풀은 밟히면 밟힐수록 생명력이 더 살아나는 법. 100년 전 한민족의 모습이 바로 그랬다. <광복가>가 나온 것이 그 무렵이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직후 3·1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1919년 3월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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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만의 대중음악 산책] 1910년 ‘학도가’···”안중근 의사 뜻 나도 따르리라”

    [아시아엔=김세만 대중음악칼럼니스트] 우리 국민은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매여 지속적인 외부간섭과 파당과 관료부패, 정치력 부재, 민심불안 등 내부요인으로 고달픈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때마다 한국인에게 꿈과 용기를 준 것이 있다. 외세를 배척하며 국권을 되찾고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결집해 민족자존과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 노래들이 바로 그것이다. <학도가>는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 병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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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아시아

    1895년 ‘의병군가’···”왜놈들아, 명성황후 시해 반드시 복수하리”

    [아시아엔=김세만 대중음악칼럼니스트] <의병군가>는 1895년?일본 침략자들에 의한 잔학무도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계기가 돼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에 의해 불렸다. 국모를 잃은 슬픔, 누란위기에 처한 백성들은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내가 아니면 누가 지키랴?” 조정은?외세의 눈치를 보면 우왕좌왕하더라도 결국 나라 위해 목숨 바친 이들은 바로 제 정신을 놓지 않은 선비와 민초들이었다. 이들이 울분을 삼키며 부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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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4·19혁명과 유석애도가

    1948년 7월17일 헌법이 공포되고 제헌절이 탄생했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군까지 철수한 한국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1950년 소련군 무기로 무장한 북한군은 3·8선을 넘어?남침하였으니 한국전쟁(6·25)이 일어난 것이다. 한반도는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조인 후?남북으로 나뉘었다. 전쟁의 폐허와 상처가 깊어 서민들의 삶은 고단한데 정치는 정파에 휘말려 더욱 불안했다. 장면 국무총리가 사임하고 국회의원 40여 명이?헌병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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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윤심덕 ‘사의 찬미’

    1926년 8월5일 동아일보는 “현해탄 건너던 중 청춘남녀의 정사(情死). 김우진과 윤심덕, 극작가와 음악가, 한 떨기 꽃이 되어 세상시비 던져두고 끝없는 물나라로 가다”라며 김우진과 윤심덕의 자살을 3면에 걸쳐 크게 보도했다. 당시 조선을 뒤흔들었던?사건이다. 우리나라 여성 취입가수 1호인 윤심덕(尹心悳)은 1919년 관비 유학생으로 동경의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수학했다. 1923년 귀국해 성악가로 활동했고 극단체인 ‘토월회(土月會)’에 참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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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일제가 금지한 저항적 예술가곡 ‘봉선화’

    울 밑에선 봉선화야 우리는 보통 한국대중가요의 전성기를 1960년대로 생각한다. 이는 방송의 발전, 특히 텔레비전 방송국의 개국(1961년 KBS, 1964년 TBC, 1969년 MBC),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국 주둔과 함께 태어난 팝송, 미8군 쇼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일제강점기부터 유행해왔던 트로트의 부흥과 함께?우리의 극장문화를 발흥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보다 앞선 1920년대를 첫 번째 한국대중가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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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처절한 민족의 함성 ‘대한독립만세’

    창가(唱歌)? 1. 창가의 탄생 창가(唱-노래 부르는 행위, 歌-노래와 음악)는 특정음악분야를 지칭하는 장르적 의미가 아니고 ‘노래’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거기에는 ‘부르는 노래’라는 뜻이 포함돼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 한자문화권 3국에서 창가라는 음악적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느냐는 매우 흥미로운 얘기다. 한국의 고가(古家), 중국의 고전(古典), 일본의 고요(古謠) 속에는 창가, 가곡, 가창, 창, 가요라는 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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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찬송가는 한국 서양음악의 전령

    1882년(고종 19년) 조미수호통상 체결 후 조선의 쇄국정책이 풀리고 의료·교육분야 선교사 입국이 허용되면서 미국선교사들이 조선에 오고 싶어 했다.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예일대 출신 의사인 아펜젤러(Henry Grehart Appenzeller, 1858~1902)는 감리교 해외 여선교회 선교사인 부인 스크랜톤(Mary.F.Scranton 1833~1909)과 함께 1884년 12월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일본에서 합류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3월31일 상선 미쓰비시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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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한국대중가요 뿌리는 초기 ‘천주교성가’

    1779년(정조4년) 무렵 경기 광주군 퇴촌면 우산2리 산176번지 천진암에서 이승훈, 권철신, 정약전, 정약종, 권상학, 이벽, 이총억, 정약용 등이 모여 천주학을 주제로?모임을 가졌다. 이 젊은이들의 모임이 ‘강악회’다. ‘강악회’는 중국 북경에 들어왔던 천주교의 그리스도사상 연구가 목적이었다. 첫 모임에서 10일간 예배를 드렸고 그후 7년 정도 유지되다 박해와 순교로 해산됐다. 천주공경가 강악회는 매월 7일,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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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세만의 대중음악산책] 아! 아리랑

    음악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가장 가깝고 친숙한 벗으로 일상 속에 긴밀하게 자리를 잡는다. 사회가 변하면서 음악 분야도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우리의 문화욕구를 충족시키고 생활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대중매체가?없던 과거에 음악은 우리 민족의?생활상과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삶의 일부였다. [대중음악산책]을 통해 서양음악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 문화로 자리잡게 된?배경과 시대적 상황을 조명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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