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임기 마치는 서울대동창회 최초 여성회장 신수정 피아니스트

신수정 서울대총동창회 회장(2018.3~2020.3)

“마음 홀가분…총동창회 좋아질 일만 남았어요”

“조성진 등 후학들에 받는 영감 놀랍고 고마운 맘”

서울대총동창회 역사상 첫 여성 회장으로 동문 커뮤니티를 넘어 대한민국 사회의 큰 관심을 받았던 신수정(서울대 기악과 59~63) 회장이 2년 단임제 첫 회장으로 3월 25일 이희범 전 평창올림픽조직위원장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임기 만료를 앞두고 서울대총동창신문이 지난 3월 4일 인터뷰했다. 서울대 연구공원 총동창회 사무처에서 열린 인터뷰는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서울대총동창신문 논설위원)가 맡았다. 이 신문은 기사 첫머리에서 “높은 관심만큼이나 역풍도 따랐다. 일부 동문들이 회장 추대 과정이 불투명하다며 소송을 냈다”며 “그런 갈등을 넘어 투명한 제도를 만들고, 차기 회장이 박수를 받으며 취임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썼다. 인터뷰 전문을 <아시아엔> 독자들께 소개한다. <편집자>

-코로나19 사태로 정기총회가 연기됐습니다. 최근 28대 회장추대위에서 이희범 전 산업자원부장관을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했는데, 임기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총회를 연기했지만, 차기 회장이 추대된 상황에서 제가 계속 있는 것은 좋지 않아 보입니다. 정해진 임기대로 3월 25일 물러나려 합니다. 회칙에 ‘회장 유고시에는 수석부회장과 부회장 명부에 기재된 순서에 따라 그 직무를 대행한다’는 조항이 있어요.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회칙의 테두리 안에서 사실상의 임기를 시작하실 수 있도록 이 전 장관님을 우선 수석부회장으로 모셨습니다.”

-지난 2년간 많은 일이 있었지요.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인간의 속성 중 망각이 참 고마운 것 같아요. 2년간 있었던 일을 다 잊었거든요.(웃음) 어젯밤 지난 2년간 무슨 일이 있었나, 서류, 신문 등을 뒤적여 봤어요. 2년간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싶더군요.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웃음) 다들 고생하셨지요? 소회라 하면 어쨌든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게 축복이란 것. 결국은 세월이 가서 2년이 됐구나, 감사하다. 그런 마음입니다.”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싶다, 그런 생각도 들었을 것 같은데요.

“힘들어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일단 회장이 된 이상 총동창회와 모교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습니다. 모교에 대한 사랑 때문에, 소용돌이도 없지 않았지요. 어떻게 하면 모교를 위해 더 나은 총동창회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런 고민에서 과한 액션도 나왔고요. 그 마음을 알기에 저를 반대하는 분들에게 손을 내밀기 위해 노력했어요. 새로 취임하신 오세정 총장님을 비롯해 학교 본부에서도 적극 도와주시고, 또 많은 분들이 애써주셔서, 총동창회는 안정을 되찾았다고 봅니다. 이번에 회장으로 추대되신 이희범 전 장관님께서는 제가 대관령 음악제 운영위원장으로 있는 동안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이셨고, 제가 현대차 정몽구재단 창립 때부터 이사로 있는 동안 이사장으로 계시기도 해서, 그 능력과 인품을 가까이서 뵐 기회가 있었기에 가장 적임자를 모셨다고 생각합니다. 총동창회의 앞날은 긍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신수정 회장과 김진국 대기자(오른쪽)

-회장님 임기 중에 생긴 불만은 그 이전부터 내려온 제도가 미비해 생긴 부분들입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회장추대위원회 규정을 잘 정비하고, 차기 회장을 만장일치로 추대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회장님의 공로가 아닐까 싶어요.

“저의 공로라니요? 주변의 여러분들께서 총동창회를 위한 사랑으로 진심으로 이끌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처음 회장추대위 제도를 적용받아 선출됐지만, 말씀하신 제도의 미비 등으로 오해의 소지도 있었어요. 그래서 임기 초부터 회장추대위 회칙을 좀더 수정·보완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해 회칙개정위원회와 발전위원회 등을 통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결국 이것도 새 회장님께서 마무리지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신 회장은 어려서부터 피아노보다 책 읽기를 더 좋아한 문학소녀였다. 그는 “수줍음을 너무 타서 힘들어했는데, 오랫동안 학생을 가르치고 보직을 맡기도 하면서 많이 좋아졌다”며 “총동창회장을 하면서 이렇게 축사와 인사 말씀을 많이 한 적은 처음인 것 같다”고 소녀처럼 해맑게 웃었다.

“추대위원회, 소위원회를 비롯해 많은 분이 정말 헌신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총동창신문 논설위원님도요. 저는 정말 그분들 덕분에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임 회장들 업적 참 대단…총동창회 50년사에 담아 곧 출간”

-또 총동창회를 이끌면서 들었던 생각은.

“전임 회장님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50년 전 총동창회를 창립한 박두병 회장님부터 초창기 기틀을 만들어주신 민복기, 원용석, 김준성, 최주호, 김재순 회장님, 장학빌딩을 지으신 임광수 회장님, 장학금 지급액 30억원 시대를 연 서정화 회장님…. 그런 분들의 공로를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난해가 총동창회 창립 50주년이었어요. 사무총장의 제안도 있어서 50년사를 정리 중입니다. 과거 회장님들의 업적을 정리해 올해 상반기에는 출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취임 인터뷰에서 동창회의 문화행사 및 봉사활동 확대를 언급하셨는데, 구현하기에 상황이 여의치 않았죠.

“그동안 대관령 국제음악제, 현대차 정몽구재단 등에 관계하면서 많은 문화 관련 행사에 참여해 왔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살려 서울대총동창회에서 문화 및 봉사활동을 통해 젊은 동문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면 총동창회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계획한 것들을 모두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지난해 음대동창회와 함께 총동창회 창립 50주년 기념음악회를 많은 동문을 모시고 했고, 이전부터 해왔던 미대동창회의 미술전, 관악극회의 연극 공연 등을 후원할 수 있었습니다.”

-갈등이 봉합되면서 회비 수입은 회복됐죠?

“동창회가 조금 혼란한 모습을 보이고, 관악회의 장학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전년 대비 회비수입이 3억원이 줄어드는 등 어려움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런 가운데서도 지난해 하반기 홈커밍데이 협찬금 등은 예년과 비교해 적지 않았어요. 경품도 푸짐했고요. 장학금도 기존대로 지급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 믿고 도와준 동문에게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올 1월 들어 회비수입도 만회하는 조짐을 보이고, 새 회장님의 리더십 아래 올해는 좋은 성과를 거둘 거라 봅니다.”

-2년이 긴 시간이 아니죠.

“제가 2년 단임 임기 회칙이 정해진 다음 첫 회장인데 장단점이 있겠지요. 긴 안목으로 큰 사업을 기획하고 추진하는 데는 2년 임기가 짧을 수 있지만, 우리 총동창회의 경우 전임 회장님들이 기초를 다져놓으셨기 때문에 2년 임기를 맡은 회장들이 자기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새로운 방면에 봉사할 수 있는 것은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위에서 언급한 문화행사나 젊은 동문, 후학들을 위한 멘토링, 각계 전문가 초청 포럼 등의 사업을 하고 싶었는데 못한 것은 아쉽습니다.”

-동창회 활동을 예술 분야, 봉사활동 등으로 넓히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관련 단과대학동창회와 협력하는 방식이 좋을까요. 다음 회장단을 위해 조언을 해주신다면.

“이 기회에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서울대총동창회는 50년 전 단과대학동창회 회장님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초대 박두병 회장님 중심으로 뜻있는 분들이 모여서 설립돼, 발전한 단체라는 것이지요. 큰 동창회는 자체적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동창회는 마음은 있어도 쉽게 할 수가 없을 때 총동창회에서 협력한다면 다양한 봉사나 문화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여성, 예술계, 작은 단과대학 출신으로 처음 회장으로 선출되셨다는 것으로도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성 측면에서도요.

“그런 면에서 많은 격려와 응원을 받았지요. 2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격려해 주시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솔직히 능력이 많은 총동창회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말씀하신 대로 최초의 여성, 예술계 인물로 가능성을 열었다는 시대적인 의미에서의 역할이 있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회장님 앞에는 첫, 최연소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녀요. 이화콩쿠르, 동아콩쿠르, 음대 수석 입학, 전체 수석졸업, 최연소 서울대 음대 교수 임용, 첫 서울대 여성 음대학장….

“돌아보면 제 능력 이상의 상, 직함 등을 받은 것 같아요. 제가 뭘 이루려고 의식적으로 한 것보다 주어진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콤플렉스예요. ‘나는 부족한 사람인데, 이런 일을, 혹은 이런 상을 받을 수 있나’ 이런 생각이 늘 떠나지 않았어요. 그러기에 저는 늘 감사하고 많이 받은 것을 나눠야 한다는 생각이 늘 있었지만, 실행은 아직도 멀었어요.”

-음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어떻게 되세요.

“어렸을 때는 책에 더 관심이 많았어요. 집에 일을 도와주는 언니가 있었는데, 글을 몰라 어머님이 글을 가르치셨는데, 어깨 너머로 제가 먼저 깨우쳤대요. 당시 동화책이 많지 않아서 <소공녀> 같은 책은 100번도 더 읽었습니다. 아버님이 옥천여중 교장선생님으로 근무하실 때 학교에 구호물자로 받은 낡은 피아노가 있었어요. 어머니가 학교 다닐 때 교사들이 일본 학생에겐 피아노를, 한국 학생에겐 오르간을 가르치는 등 차별을 받으셨대요. 그런 경험 때문이신지 학교에 있는 피아노를 배우게 했습니다. 6·25 때 피난 오신 서울 음악 선생님께서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하셔서 피아노를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졸업할 때도 전교 수석으로 박정희 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을 받으셨죠.

“그때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셨는데, 본래의 대통령상과 내각수반상 외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이 생겼어요. 여담이지만, 그 해 대통령상, 내각수반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상 수상자가 모두 여자였어요.”

-오스트리아에 계실 때 가톨릭부인회 장학금으로 어려운 유학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수녀원 기숙사에서 생활하셨죠.

“네.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전부 장학금으로 공부했어요. 귀국 후 음대에서 가르치다가 미국 피바디 음대로 유학 갈 때도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공부를 했고요. 늘 아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죠. 당시 오스트리아도 그리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어요.”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와 음대 교수가 되셨을 때는 요즘 아이돌 이상의 인기를 누렸다고 하던데요.

“그 당시에는 음악 인구가 많지 않았고 외국 유학생도 적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론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주셨습니다. 음악 인구가 적다 보니 받은 혜택이 많았어요.”

신 회장은 1967년 오스트리아에서 귀국 후 1969년 26살의 나이로 음대 교수가 됐다. 2005년에는 여성으로 처음 서울대 음대 학장이 됐다.

“그때는 정말 기뻤어요. 여학생과 여교수님이 많았는데, 한 번도 여자가 학장이 된 적이 없었거든요. 저 다음에 김귀현 두번째 여자 학장이 나오셨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음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연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음악 하는 후학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가요.

“연주란 자기의 표현이라고 믿습니다. 연주하는 것을 보면 대개 그 사람의 성격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성도 나타난다고 하지요. 그러기에 자기 자신을 닦는 노력은, 끊임없이 기술을 연마하는 것과 똑같이 중요한 거라 생각합니다. 그 진솔한 표현이 청중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가장 훌륭한 연주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은 시대를 떠나 언제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길인 것 같아요.”

-조성진을 비롯해 많은 피아니스트를 길러내셨지요.

“제가 길러냈다기보다 그들이 워낙 탁월한 재능을 이미 갖고 있었어요. 벌써 손주를 둔 옛 제자들도 있어 긴 세월을 실감합니다. 사실 저는 제자들에게 감사한 게 더 많아요. 제자들에게 오히려 배우며, 또 다른 젊은 음악가들에게 받는 영감은 놀라운 것이에요. 지성과 감성, 패기와 당당함, 그들이 연주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그 음악성에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저렇게 연주를 잘할 수 있을까 대견하고 기특해요. 저 어렸을 때와 비교해 보면 인간의 진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끼’와 예술성은 국제적으로 인정받는데, 우리나라는 그 재능을 펼칠 무대가 좁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얼마 전 회장님이 연주하시는 걸 보고 어떻게 저 연세에도 저렇게 연주를 잘할 수 있을까, 힘이 있을까, 감탄했습니다.

“어렸을 때 훈련이 아직 건반을 떠나지 않은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오신 피아노 선생님이 무척 엄했어요. 손가락을 제대로 안 하면, 엄하게 혼을 냈어요.”

신 회장 가족은 모두 서울대 동문이다. 부모님은 물론 여동생은 미대, 남동생들은 공대 출신이다. 그동안 신 회장은 서울대 명예교수, 예술원 회원(현 부회장), 국제콩쿠르 심사 등 계속 활동을 해왔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이제 조금은 여유를 갖고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특히 가르친다는 것은 연주와 달리 경험이 커다란 역할을 차지합니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을 젊은 세대와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바깥에서 총동창회의 발전을 기원하겠습니다.” <정리=김남주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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