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43) 저격능선 전투

1952년 10월에 이르러 밴 플리트 장군은 금화 북쪽의 오성산과 삼각고지~저격능선을 확보하여 위협이 되고 있는 중공군을 제압하기 위해 9군단으로 하여금 삼각고지~저격능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8군은 16개 포병대대와 전투기 200회 출격의 화력지원을 계획하였고 9군단장 젠킨스 장군은 5일 이내에 목표를 탈취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였다. 그러나 백마고지 전투로 포병 및 공중지원이 계획에서 벗어남으로써 작전은 최초부터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10월 14일 미 7사단과 한국군 2사단은 삼각고지~저격능선을 목표로 좌우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삼각고지에는 중공군 45사단의 135연대, 저격능선에는 133연대의 1개 대대가 강력한 진지를 구축 방어하고 있었다. 7사단은 10일간의 격전 끝에 삼각고지 일대를 점령하였으나, 2사단은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중간목표에서 진출이 저지된 채 병력 손실만 가중되었다. 11월 5일 더 이상 병력손실을 우려한 군단장은 공격중지를 명령하였다. 작전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9군단은 9000명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중공군도 1만9000명 이상의 병력손실이 있었던 것으로 추계되었다.

오성산의 탈취는 전선의 유지를 위해서는 필요한 작전이었지만, 1952년 10월에 이르러 오성산 주위는 이미 철저히 요새화되어 보병돌격으로 탈취하기는 어려운 난공불락이 되어 있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일본군 최고 군사령관 노기마레스께(乃木希典)대장의 2군이 여순(旅順)을 감제(柑制)하는 203고지를 공략하기 위해 돌격을 감행하다 두 아들(勝典, 保典)을 포함해 무수한 사상자를 낸 것을 연상케 한다. 저격능선 전투에서도 갓 임관한 한국군 신임 소위들이 무수히 희생되어 ‘소모품 소위’라는 말이 이때 생겨났다.?

중공군은 이 전투를 ‘상감령(上甘嶺)전투’로 불러 높이 평가한다. 현리전투는 한국군 3군단 지휘부의 어이없는 실수로 얻은 쉬운 승리였지만 상감령전투는 막대한 화력의 지원을 받는 한·미군의 준비된 공격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높이 산다. 인해전술로 파상공세를 퍼붓는 지금까지의 중공군 전법이 아니라 요새에서 공격을 막아내고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방어 전법을 구사한 것인데, 이는 임시휴전기간을 이용한 요새공사에 힘입은 것이다. 중공군에 이를 허용한 미국 전쟁 지도부의 천려일실(千慮一失)에 수많은 일선 장병들이 희생된 것이다.?

오늘날 북한의 오성산 요새는 우리측의 대우산 요새와 대치하고 있다. 피아의 요새는 핵폭탄이 아니면 공략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고히 요새화되어 있다. 앞으로도 오성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비장의 방법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철과 바위’는 ‘피와 살’로는 공략하기 힘들다. 2차대전시 크레타의 영국군 요새를 글라이더를 이용한 독일군 공정부대가 제압한 것과 같은 방법도 그 하나이다.?

10월 14일부터 11월 5일까지의 9군단의 저격능선 전투가 실패로 끝난데 비하면 10월 6일에서 15일까지의 9사단의 백마고지 전투가 성공으로 끝난 것은 대조를 이룬다. 저격능선 전투는 ‘무모한 공격’이었고 백마고지 전투는 ‘필사의 방어’였다. 적은 아군을 공격하기 어려웠고, 아군은 적을 공격하기 어려웠다. 피아간에 희생만 늘어갈 뿐 전국(戰局)의 돌파는 점점 어려워갔다.

이제 클라크 장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열기 위해 새로운 대규모 작전을 구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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