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의 Asian Dream] 두 얼굴의 사무라이,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 오이타현 나카츠시에 있는 나카츠성은 메이지유신 때 폐성 됐다가 1964년 오쿠다이라가(奧平家)의 17대 당주가 재건해 지금의 모습이 됐다. <사진=위키피디아>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쪽문을 밀었다. 그러자 가볍게 문이 열렸다. 그는 살며시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만일 발각되면 ‘재종형을 만나러 왔소’ 하면 된다.

존왕양이파(尊王攘夷派)에 의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년)이 단행된 뒤이지만 여전히 정국은 불안하다. 소위 양학자(洋學者)들은 아직도 위험인물이었다. 어머니를 에도(東京)로 모시기 위해 큐슈의 분고(豊後) 나카츠번(中津藩) 고향집에 돌아 온 후쿠자와 유키치. 그의 출현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전체 성읍에 알려졌다. 나카츠성 아래 시골 마을은 집 둘레에 담도 없고 문단속도 거의 없어 암살자가 숨어들기는 어렵지 않았다. 젊은 사무라이는 집 뒤쪽의 소나무를 쳐다보았다. 이제 곧 어두워진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방에서는 후쿠자와가 손님과 술을 마시고 있다.

“그래 감회가 어떤가?”

“나카츠는 여전하군요.”

“고향이 그대로라고 불만을 가질 건 무언가. 자네는 하층 고시(鄕士) 집안이면서도 공부나 완력에서 상급 조시(上士)의 아이들에게 절대로 지지 않았네.”

“그래서였죠. 어린 마음에도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소질이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상급사족은 하급사족을 멸시하고, 항상 신분의 제한과 문벌의 차별이 따라다니니…. 서남부 지역의 고시 출신 지사들이 이번 싸움의 주역으로 나선 이유를 아시지요?” 후쿠자와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도 양학 공부에 매진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핫토리 고로베에(腹部五郞兵衛)가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봉록 200석의 조시로서 번의 유력자이지만, 후쿠자와는 어려서 그에게 사서(四書)를 배운 인연으로 선후배 사이로 지내고 있다.

“저야말로 공부를 싫어하는 놈이었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시경이며 서경을 자유로이 읽을 때 겨우 맹자를 더듬는 정도였으니.”

“그래도 경전의 의미를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만드는 데는 누구보다 뛰어났었지. 자네는 학문에 재능을 타고났네.”

“열심히는 하지요. 대부분의 서생들이 좌전(左傳) 열다섯 권 중 서너 권을 못 견디고 포기했지만 나는 그 전부를 족히 열 번은 더 읽었을 것입니다.”

“자네는 이번 유신에도 큰 기여를 했네.을 존양파는 물론이고 정권을 잃은 도쿠가와 바쿠후(幕府)의 최고위층도 모두 읽었다 하지 않는가.”

“외국 서적의 번역은 어지간히 했으니 앞으로는 제대로 된 학문을 하고 싶습니다.” 후쿠자와는 존양파에 의한 바쿠후 타도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깥 사정을 어느 정도 파악했으니 이제는 우리의 생각이 필요하단 말이겠지?” 핫토리 선배는 일찍이 가고시마에 나가 서양 포술을 배울 정도로 새로운 지식에 개방적인데다 성격이 무척 활달해서 마주 앉아 술을 마시면 끝없이 논쟁이 이어졌다.

“일본 역사에서 이질적인 문화 접촉의 큰 기회는 두 번, 그 첫 번째는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이 중국에서 전해졌던 상고의 경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서양 문명과 조우한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한 몸으로 두 삶을 사는 것 같고, 한 사람에게 두 몸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중국적 삶과 서양적 삶을 함께 살아야 한다? 그것 참 멋진 표현이군. 자네는 그 두 가지 삶을 어떻게 한 몸으로 감당할 텐가?”

“중국도 조선도 위선적 도덕군자의 늪에 빠져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연마할 생각을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금수처럼 서로 다투는 세상에서 독립국이 되려면 아시아적 도덕주의를 탈피해서 서양의 지성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덕(德)을 버리고 지(智)를 취한다는 말은 아니기를 바라네.” 새벽까지 술친구를 해주던 선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근처에도 수상한 놈이 있을지 몰라.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세상에는 혼자서 멋대로 생각하고 상대의 치수가 자기의 가늠과 맞지 않는다고 거꾸로 화를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치 같은 놈들이지요.” 큰 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사실 후쿠자와는 에도나 오사카에 있을 때 밤에는 절대로 외출을 하지 않는다. 여행을 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가명을 사용한다. 마치 남의 눈을 피해 도피행각을 벌이는 사람 같지만 목숨을 유지하려면 별 수 없다.

가슴이 답답해진 후쿠자와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마루 밑에서 이끼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훅하고 올라왔다. 소나무 그림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뜰의 정원수가 부스스 움직였다. 후쿠자와는 재빨리 단검을 뽑아 들었다.

“잘도 지껄이는군. 오늘 대답에 너의 나머지 목숨이 달려있다.” 어둠 속에서 긴 칼이 달빛을 받아 번쩍였다.

“무엇을 대답하라는 것이냐?”

“거짓 없이 대답하라.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본국을 병력이 강하고 상업이 번성하는 대국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꿈이다. 동양에서라면 일본이 서양의 영국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힘이 곧 정의이고, 권력이야말로 올바른 도리(正理)의 원천이다.”

일본 1만엔권 화폐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

풍운의 시대를 살아남아 생전에 자신의 꿈이 모두 실현되었노라 기쁨을 토로한, 흔치 않은 행운의 인물. 지금도 ‘계몽의 아버지’로 불리며 만엔권 지폐의 얼굴로 살아있는 후쿠자와 유키치. 그는 서구 문명을 보편문명으로 상정하고 아시아를 주변으로 제물삼아 일본중심주의를 전개했다. 그런 탓에 서구중심주의의 아류로서 일본근대화를 추진하고, 아시아를 대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한 얼굴이기도 하다. 자기중심주의는 필연적으로 타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요구한다.

그래서 일본파시즘과 일본제국주의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후쿠자와의 두 얼굴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하는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그의 주장이 가진 보편적인 한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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