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광동제약 故최수부 회장 “아들아, ‘최씨고집’ 이어 세계 일류회사로 키워주렴”

지난 7월24일 78세를 일기로 별세한 최수부 광동제약 회장. ‘최씨고집’ ‘뚝심경영’의 대명사로 불리는 그는 생전 “나는 한눈 팔지 않고 나의 길을 걸어왔다. 천천히 여문 기업이 10년, 50년, 100년 후에도 살아남는다”고 했다. 고 최수부 회장이 아들인 광동제약 최성원(44) 사장에게 보내는 편지형식으로 그의 오비추어리를 작성했다. <편집자>

사랑하는 아들, 성원아!
내 갑작스런 죽음에 모두들 놀랐겠구나. 닷새장 동안 내 마지막 가는 길을 찾아준 많은 분들과 고별인사를 할 수 있게 해줘 우선 고맙구나. 특히 부조금을 받지 않은 것은 평소 내 뜻을 따라주어 더욱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기업 대표나 고관대작이 상을 당하면 ‘을’ 관계에 있는 거래처나 부하직원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는 줄 알 사람들은 다 알거든. 명목은 조위금이지만 일종의 뇌물인 현실에서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오늘 땅 속에 들어와 편히 누우니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구나. 아, 그리고 보니 올 10월16일은 우리 회사가 창립 50돌을 맞는 날이구나.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서 새로운 100년의 기틀을 잡아주기 바란다.

이렇게 네게 편지를 쓰다 보니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일이 있구나. 1998년 봄. 우황청심원과 쌍화탕 등으로 잘 나가던 회사가 하루 아침에 부도위기에 처했을 때 말이다. 1998년 4월28일, 날짜도 정확히 기억이 난다.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발벗고 나선 이들이 직원들이었지. 노조는 98년분 상여금을 자진 반납하기로 결의했고 나도 대표이사 주식 10만주를 직원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했지. 직원들은 그해 6월 노사발전추진위원회를 만들어 30분 조기출근, 30분 더 일하기 운동 등을 펼쳤지.

내가 세상에 ‘최씨고집’ 등으로 유명세를 타고 광동의 오늘이 있게 해준?것은 직원들 덕이 컸지. 최 사장도 직원을 늘 가족처럼 대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사람들은 나에게 ‘최씨고집’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지. 나는 그게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다. 초등학교 4년 다닌 게 내 학력의 전부이지만 세상 어느 곳이나 내게는 다 학교였다. 학력보다 중요한 건 하겠다는 나의 의지와 세상에 맞서는 행동이었지.

사랑하는 아들 성원아!
‘광동호’의 선장으로 회사를 이끌어가야 할 네게 경영선배로서 몇 마디 남기고 싶구나.

경영이건 마케팅이건 모두 책이나 책상머리가 아닌 현장에서 소비자와 부딪치며 전략을 구상하고 판매에 돌입하는 데서 나온다고 나는 본다. 그게 진짜 마케팅이지. 해답은 대부분 시장에서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내 평생 가장 중요하게 여긴 건 신용이라고 자부한다. 이익을 지나치게 남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다. 또 진정한 웃음과 친절한 말은 경영하면서 큰 밑천이 될 것이다. 이것은 반복해서 써도 바닥이 안 나는 법이거든. 그리고 경영자는 무엇보다 부지런해야 한다. 너도 아다시피 부지런한 건 내 특기 중에 하나 아니냐. 젊은 시절엔 매일 새벽 대여섯 시에 눈떠서 30, 40리 길을 걸어서 다녔지. 그러면서 내가 모은 건 돈이 아니라 희망이었단다. 나는 세상에 약을 팔고 그 대신 희망을 산 것이지.

옛 생각이 불현듯 나는구나. 가가호호 다니면서 약을 팔던 시절 얘기지. 군에서 제대하고 경옥고 회사에 취직했을 때 일이란다. 한 개도 팔지 못했는데 더 문제는 그 누구도 내 말을 제대로 들으려 하지 않는 거야. 문전박대는 예사구. 그렇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지.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 그거 틀린 말이다. 안 넘어가는 나무가 허다하지만 넘어갈 때까지 찍으면 반드시 넘어간단다. 한번은 미양사라는 양복점을 하는 분한테 경옥고 2통을 팔아 삼천환의 수익을 올렸어. 당시 꽤 큰 돈이었다. 그 이후 그 양복점 단골이 되었다. 내가 소개해서 팔아준 양복만도 족히 수백 벌은 될 걸, 아마.

기왕 얘기 꺼낸 김에 약 팔면서 겪은 일 한두 가지 더 들려주마. 아련한 기억이 뿌듯하기도 하는구나.
한번은 약을 팔러 재무부 이재국장 방을 갔단다. “좋은 약 있어서 국장님께 소개해 드릴라꼬 왔심더” 그랬지. 그랬더니 국장이 여비서를 부르면서 “너는 비서라는 게 뭐하는 거야. 어디 감히 약장수 따위를 내 방에 들여보내. 그러고도 월급 받을 거야?” 그러더구나. 그날 밤 약장수 따위란 말까지 들으며 이 짓을 해야 하나 고민 끝에 이튿날 다시 찾아갔어.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요, 국장님께서는 저 같은 장사꾼과는 달리 우리나라 최고학부도 나오시고 고시까지 패스한 분입니더. 이재국장이라 하면 우리 같은 사람이 하늘같이 우러러볼 수밖에 없지예. 하지만 저도 세금 꼬박내고 사는 이 나라 국민입니더. 근데 국장님이 어제처럼 사람을 면전에 두고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것은 도무지 납득을 못하겠십니더. 제 동생도 서울대학교를 다니는데 참 너무 하십니더.” 그리고 나오려는 순간 이 분이 “자네 말 들으니까 어제는 내가 너무 심했네. 어떻게 하면 풀어지겠나? 내가 약을 하나 사주면 풀어지겠나?” 그러는 거야. 그 말에 “이왕 사주실 거면 온가족이 다 먹을 수 있는 큰 걸로 사주이소.” 그리고는 12개짜리 한재를 팔았단다. 이 일 후 더욱 굳게 다짐했지. 어떤 경우라도 내 일에 대한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으리라고. 이후 국회 회의실에도 들어가서 경옥고를 팔았단다.?

억울하고 어처구니 없는 일도 있었지. 내가 77년 7월3일 서대문형무소에 구속 수감돼 99일간 살았지. 약사법위반 및 탈세 혐의였단다. 어느 국회의원이 본회의장에서 우리 회사와 관련된 얘기를 허위로 폭로했어. 국세청, 감사원, 검찰까지 동원돼 구속됐는데, 나중에 무혐의가 됐지만. 그런데 나중에 이 의원이 찾아와서 “지난번 최 사장을 모함했던 내 보좌관말이오, 그놈이 글쎄 이번에는 나를 걸고 넘어지네요. 내가 여성당원을 성폭행했다고 청와대에 투서했지 뭡니까. 최 사장 일이나 내 일이나 그놈이 제보했으니 혹시 그 일로 청와대나 수사기관에서 최 사장을 부르면 그 보좌관 말은 믿을 게 못된다고 잘 좀 전해주세요” 그러는 거야. 내가 그에게 잘라 말했지. “사실확인도 없이 전직 보좌관 말만 듣고 조용히 기업하는 작은 회사에 씻지 못할 상처를 주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세금 꼬박내고 일거리 창출하는 기업에게 큰 박수를 보내고 일 더 잘하도록 까다로운 법규 줄여주고, 시장이 불안하지 않도록 정치를 안정시켜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을 늘 갖고 있지. 건전하고 부지런히 경영활동을 해서 이익을 남기는 자본가를 부도덕한 자본가로 제발 매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한국의 정치나 사회 현실을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대목이 바로 그것이지.

사랑하는 아들 최성원 사장!
나는 1936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5남2녀의 둘째로 태어나?학교에서 많이 배우진 못했지만 후회는 별로 없다. 내가 가진 에너지를 몽땅 쏟아부으니 내 짧은 학력을 따지는 사람도 없고 나 또한 후회나 하소연을 해본 적이 없단다. 대신 시장이 내 스승이었단다. 그곳에서 같은 값이라도 좋은 물건을 고르는 법, 같은 물건도 싼값에 사는 요령,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지.

사랑하는 아들 성원아.
네가 서울대학 경영학과 다닐 때 과외 아르바이트를 못하게 했던 것, 대신 내가 용돈은 여유 있게 주었지. 그래야 쉽게 번 돈 쉽게 부서지고, 돈 잘 쓰는 게 무언지 알게 하려고 그랬던 것이란다. 그때 많이 섭섭했지?

자랑스런 내 아들 최성원 사장.
다시 자네에게 들려주고 싶은 경영자에 대한 얘기일세. “경영자가 돈을 얻으면 조금 얻은 것이요, 명예를 얻으면 많이 얻은 것이요, 신용을 얻으면 모든 걸 다 얻은 것이다”란 말, 내가 늘 강조했던 이 말, 내 아들 자네도 꼭, 항상 명심해주기 바라네. 신용이 없으면 사업도 인생도 모두 허사인 것이지.

사랑하는 아들.
사람이 회사에선 가장 중요한 자산이란 말도 보태고 싶구나. 봉급 더 준다고, 일이 조금 힘들고 맘에 안 든다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사람들은 절대 성공 못한단다. 진득하게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을 고르는 눈이 경영자에겐 특히 중요하지.

한때 우리 회사 광고에 ‘40년 최씨고집’이란 말이 있었지.
맞다. 나한테 그 고집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다. 평생 한우물을 판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믿는다.

광동을 창립해 50년을 지내오면서 내가 깨달은 영업비밀은 다음과 같다. 포기하지 않는 집념과 끈기, 당당한 자세와 배짱, 그리고 성실한 고객관리 바로 그것이다. 26살 나던 겨울, 경북 고령 출신의 네 어머니 박일희와 장가가기 전날까지 약을 판매했지. 내 원칙은 어떤 경우에도 정직하라, 신뢰를 가장 소중히 여겨라, 항상 부지런하라. 가능한 한 절약하라, 믿음이 하늘보다 사람을 먼저 감동시킨다 이런 말들이다. 나는 요령 있는 장사꾼이 아니라 믿음을 파는 장사꾼이고 싶었단다.

언젠가 얘기했지만 광동제약 이름이 나오게 된 사연을? 다시 들려주마. 광화문에 있는 이름난 작명사에 가서 ‘廣東’ 넓을 광, 동녘 동이라고 지었어. 그 분 말씀이 이래. “한약재의 본거지는 중국이고 중국에서도 가장 큰 성이 광동성이다, 광동성은 예로부터 한약재가 많이 나기로 유명하다. 그러니 광동이란 이름이 좋다.” 그래서 광동제약사가 되었지. 처음엔 공산주의 국가 지명을 따왔다며 부정적인 인상도 있었어. 중국에는 광동성, 대한민국에는 광동제약, 멋지지 않느냐? 2000년부터 본격화한 중국진출에 회사 이름도 한몫하고 있는 것 같구나.

자랑스런 내 아들 최성원 사장!
내가 영업사원들한테 주문하는 말을 기억하지? “친구나 친지 등 아는 사람한테 의존해 영업하면 오래 못가니 전혀 모르는 곳부터 찾아다니라.” 우리 회사 사훈 ‘인내, 창의, 화목’ 이것을 자네가 꼭 지켜나가고 발전시키기 바라네. 우리 회사 상징인 거북이는 1만년을 산다는 장수동물인데, 묵묵히 행동으로 옮기는 인내와, 부화되는 순간부터 자신이 부딪히는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가는 창의성 그리고 불교에서 수신의 상징으로 용궁을 안내했던 화목함 그런 뜻이 맘에 들어서 정한 것이지.

사원수가 10명에서 100명으로 늘어나면 사장 귀는 10개에서 100개로 늘어나야 해. 그들의 말을 새겨듣고 기억하는 마음의 넓이도 커져야 하고. 또 직원들 제안을 실천하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발걸음도 그만큼 빨라져야만 하는 것이지.

사랑하는 아들!
경옥고 만드는데 꼬박 72시간 중탕이 필요한데 제조기술자가 퇴근하면 나는 밤새 가마 곁을 지켰지. 그러면서 좋은 품질의 경옥고가 익어가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지금 느껴도 참으로 정겨웠고 그 소리를 듣는 기쁨은 정직하고 정성스레 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었다.

내가 외국출장 등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원 경조사에 100% 참여하려고 노력했던 것, 아무리 회사사정이 어려워도 직원식당의 쌀과 음식재료들은 항상 최상품을 쓰도록 한 것, 직원들과 되도록 회식을 많이 가지며 함께 어울리던 게 어제 일만 같구나.
한때 폭탄주 수십 잔을 마시고도 끄떡 없었지만 만년에는 ‘술 마시고 취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와인 두세 잔으로 만족했지. 그 역시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내 아들 최 사장!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세상도, 시대도 바뀐 만큼 나처럼 두주불사 하기보다는 술 마시더라도 적당히 마시며 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시장을 늘 살피고, 틈틈이 책 많이 읽으며 미래경영 비전을 다지길 바라네.

‘소비자를 위해 약재를 고르다가 그 자리에서 삶을 마감하는 내 마지막 꿈’을 우리 자랑스럽고 믿음직스런 최성원 사장에게 넘기며 편지를 마치려 하네.

광동제약이 세계적인 신약을 개발하고 직원 모두가 한 마음으로 고객을 주인으로 모시며 사회에 기여하는 아름다운 기업으로 키워주는 꿈, 그것 말일세. 힘 내게나, 내 아들 ‘최’ ‘성’ ‘원’ 사장!

2013년 7월28일 아버지 씀

One comment

  1. 저는 85,86,87년 광동제약 영업부에 근무하면서 회장님께서는 50대초반이셨습니다 지금은 저도 50대 중반,나이들수록 더 절실하게 와닿은 추진력,성실함 ,아들인 최성원사장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남자들의 명심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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