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바로알기] ⑤모하메드, ‘중년의 위기’ 거쳐 동굴서 ‘득도’

40대로 접어든 그는 요즘 표현으로 일종의 ‘중년의 위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는 “인생이 과연 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메카 사회 전체가 대상무역 호황으로 잘 살게 됐으면서도 왜 과부들이 어렵게 살아야 하고 고아들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지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중국을 포함한 동양사회에서 뭔가 도를 깨치려면 산으로 들어가듯이 모하메드 또한 이런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시간만 있으면 메카 인근의 ‘자발 안누르’(빛의 산)에 올라가 마음의 평안을 얻곤 했다. 그러던 중 산속의 동굴(히라 동굴)에 들어앉아 명상을 하다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되뇌어라(Recite!)”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뭘 되뇌라는 건지요?”라고 대꾸하다가 그는 세 번에 걸친 명령을 받은 후에야 겨우 숨이 막히는 고통 끝에 저절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것을 경험했다.

너희를 창조하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되뇌어라
단 한 방울의 피로 인류를 창조하신,
되뇌어라

그리고 너희 하느님은 최고로 창조적이시느니라

그는 인류를 펜으로 가르치셨고
인류가 알지 못하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셨느니라
(코란 인용문, 필자가 영어판에서 번역)

모하메드는 이런 두려운 경험 끝에 산에서 내려와 아내 카디쟈에게 자기가 겪은 일을 털어놓으며 악마의 유혹을 받았든지 아니면 자신이 정신이상이 된 것이 아닌가 물었으나 그녀는 친척이자 한때 네스토리안 기독교 수도승 생활을 했던 와라카 이븐 나우팔을 찾아가서 그의 신비한 경험이 실제로 천사의 방문이며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임을 확인시켜줬다.

그로부터 632년 사망 때까지 모하메드는 이슬람을 전파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고 그런 과정에서 조금씩 무슬림 커뮤니티의 정치적 세력도 확장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모하메드가 610년 히라동굴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한꺼번에 다 받은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조금씩 받았고 이를 그대로 기록 집대성한 것이 다름 아닌 코란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코란이 과거의 종교 경전들과는 완전히 담을 쌓은 새로운 내용은 아니고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전부터 아라비아 반도에 자리잡았던 종교전통들과 상당한 유사성을 갖고 있었다.

혁명적 사상에 지배층 심한 박해···메카에서 메디나로 도피??

그러나 모하메드의 선교활동은 그렇게 순탄한 것이 결코 못 되었다. 메카의 지배계층이던 코레쉬 부족들이 그의 가르침에 매우 못마땅해 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말해서 모하메드의 설교가 자신들의 존립기반을 뒤흔드는 너무 혁명적인 것이었던 까닭이다. 그는 계시를 받은 후부터 메카 저자 거리에 나서서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 돈 있는 사람들은 일정한 부를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고아와 과부들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여성이나 노예들에게도 권리를 부여하자” 등 혁명적인 구호들을 부르짖고 나서니 평민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고 지배층 엘리트들은 모하메드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서 메카는 당시 무역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수백 가지의 잡신들을 모신 카바 신전에 몰려드는 수많은 순례자들을 받아들여 엄청난 돈을 벌어들이는 일종의 ‘종교관광’ 중심지이기도 했다. 요즘에도 어떤 관광지를 가도 그렇듯이 7세기 초 메카 또한 도박, 매매춘, 음주, 마약 매매 등 부도덕한 비즈니스로 거두는 음성적인 수입이 막대했을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하메드라는 자가 나타나서 “세상에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으시다, 모든 다른 신들은 다 우상이다”라고 주장하고 나서니 코레쉬족 엘리트들은 관광수입이 줄어들 것에 대해 걱정하고 그때부터 이슬람 신도들을 탄압했던 건 어떻게 보면 극히 자연스런 반응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교주 격인 모하메드를 죽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메카 지도층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모하메드는 계시를 받은 다음 12년이나 계속해서 메카에서 설법을 할 수 있었으며, 이는 전적으로 삼촌 아부 탈리브가 그를 보호해준 덕택이었다. 그러나 계시 12년째에 삼촌과 아내 카디쟈가 잇달아 죽고 모하메드는 이제 적들의 공격 앞에 그대로 노출되는 신세가 됐다.

결국 메카에서 더 이상 자리를 잡지 못하고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렵게 되자 모하메드는 622년 당시 야트리브라고 불리던 메디나로 몇몇 무슬림 동조자들과 함께 야반도주를 하고(헤지라) 메디나에서 이슬람의 종교적 이상을 그대로 따르는 종교 커뮤니티를 꾸릴 수 있었다. 모하메드가 메디나에 자리를 잡은 직후에 시행했던 정책 중 하나는 자신이 평소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듯이 고아나 과부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소득의 일정 비율을 기부해야 하는 의무(자캇)를 무슬림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다섯 개의 계율 가운데 하나로 정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코란에서도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여성들에게도 일정한 상속 권리를 부여하고 특별한 사유가 없이는 남자 마음대로 이혼할 수 없도록 했다. 또 일부다처제(4명까지)를 인정하긴 했지만 모든 부인들에게 공정하게 대할 자신이 없으면 한 명만 데리고 살라고 분명히 일부일처제를 선호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물론 이런 여성보호 규정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별 것 아니지만 과거 7세기 기준으로 보면 중국이나 유럽 등 다른 문명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혁명적인 아이디어였다.

여기서 왜 ‘야트리브’가 ‘메디나’가 됐는지 유래를 잠시 살펴보자. 메디나는 말 그대로 하면 그냥 아랍어로 ‘도시’라는 뜻 밖에 없고 실제로 거의 모든 아랍 지역 대도시들에는 메디나라는 이름으로 구 시가지가 있다. 모하메드가 역사상 최초의 무슬림 커뮤니티를 꾸린 메디나는 원래 ‘메디낫 안나비’(선지자의 도시)였는데 이를 줄여서 그냥 메디나라고 불렀던데 연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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