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김일성 족적’ 알면 ‘3대세습 비결’ 보인다

1910년대와 1920년대 만주 항일운동의 대들보는 민족주의자였다. 그러나 1920년대 말부터 민족주의자들의 무장 항일투쟁은 힘을 잃어갔고 1930년대 초부터는 공산당의 유격전이 만주에서 조선독립운동의 대세가 되어갔다.

1931년 이후 중국공산당은 만주의 중국 및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항일연합전선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중국인 양정우가 조직한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軍) 제1사(師)이다. 1933년에 이르러 양정우의 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으로 확대되었고, 1935년 말에는 5개 군이 조직되었다.

중국공산당은 1935년 8월1일 ‘8·1선언’을 발표, 국부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항일민족통일전선’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이 선언에 호응하여 1936년 2월 만주 내 대부분의 항일 무장세력이 동북항일연군에 통합되었다.

1930년대 말에 동북항일연군은 11개 군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후 3개 노군(路軍, 집단군)으로 재편되었다. 노군이라는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실제 병력은 1만5000명 정도로서 사단급이었다.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가 동북항일연군에서 활약하였다. 그 중 세 명이 군을 지휘했고 6명이 사장(師長)으로, 12명이 군(軍), 사(師), 단(團)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했는데 김일성은 6명의 사장 중 하나였다.

1930년대 중반 동부항일연군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던 만주국에 골칫거리였고 1937년부터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있었다. 조선인이 지휘한 몇몇 부대들은 대담하게 한만국경을 넘어 북한지역으로까지 침입해 일본 경찰을 습격하였다. 그 중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가 수행한 보천보 전투는 그중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보천보 전투로 김일성이 한반도 북부와 만주 남부에 알려졌는데 이것이 후일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발탁되는데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

1939년 노몬한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은 관동군은 대소전(對蘇戰)보다 동북항일연군 소탕에 주력하게 되는데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말까지 대부분 소탕되고 잔여 동북항일연군은 중국 본토나 소련으로 흩어졌다. 소련으로 넘어간 동북항일연군의 잔존 세력은 극동군관구 정찰국의 88여단으로 편성되었는데 여단장은 중국인 주보중(周保中), 여단 정치위원은 최용건이었다. 88여단은 4개 대대로 구성되었는데 김일성과 강건은 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동북항일연군에서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자발적이고 동지애적인 협조가 없이는 결과를 기대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은 조선인들에게 엄격한 상하관계를 강요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중국인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관계는 동지적 유대가 강하였다. 각 사장들은 독립성이 강하였고 부대를 실질적으로 책임졌다. 군은 이러한 사의 연합체였다.

반면 88여단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동료가 아니라 주인이었다. 조선인 빨치산들은 상전을 모시기 위한 인내와 지혜를 배워야 했다. 25군 정치위원으로 북한의 정치공작을 책임진 스티코프가 88여단에서 조선인들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하여 김일성을 추천했을 것이고 스탈린도 조선공산당의 정통 박헌영보다는 소련군에서 다듬은 김일성을 선호하였을 것이다.

김일성의 족적을 더듬는 것은 3대를 가고 있는 김일성 족벌의 비결을 꿰는 데 기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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