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효 칼럼] 시대의 현장

에티오피아, 멕시코, 미국, 벨기에, 이집트,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이병효 칼럼리스트의 한국근대사 강연에 귀기울이고 있다.

지지난 주말 충남 예산에 다녀왔다. 예당지에 갔다가 대흥 한옥체험관에서 1박을 하고 이튿날 수덕사를 들르는 일정이었다. 주니어 아시아기자협회(AJA) 프로그램에 참여한 중국, 이집트, 에티오피아, 벨기에, 멕시코 유학생 워크숍이 일정에 포함돼 있었다.?한국 대학, 대학원에 와서 공부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한국의 현대사를 간결하게 요약, 정리해 들려주는 자리를 가졌다.

약 30분 안에 194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시대적 위치와 핵심의 변화를 한눈에 파악하도록 돕기 위해 ‘시대의 현장’이란 개념을 소개했다. 여기서 시대는 편의상 10년을 단위로 1940년대부터 1950년대, 60년대,…, 2010년대까지 구분했고, 현장은 각각 그 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간과 장소, 조직과 기관을 지목해보려 했다. 한국 현대사에서 1950년 6·25전쟁과 1960년 4·19혁명, 1980년 광주항쟁처럼 매 10년 마디마다 큰 사건이 유난히 많았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외국 유학생들에게 영어로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시대의 현장’은 ‘A place to be of the decade’라고 옮겨 말했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가장 가고 싶고, 있고 싶은 곳이 있다는 취지였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특정 시기에 ’시대의 현장‘에 있던 구성원들이 다음 10년 또는 20년의 시기에 사회적 패권을 쥐고 주도적 위치에 섰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1차적 산업화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일본이 만주경략과 중국침략을 위해 조선반도를 병참기지로 활용하려는 목적으로 군수산업 중심의 공장을 건설하면서,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조선의 보통학교 학생 수도 1930년 근 49만 명에서 1935년 약72만 명으로 급증, 공장노동자 공급능력을 키웠다. 1938년 4년제 보통학교 명칭을 ‘내선일체’라는 구호 아래 규정상 6년제인 심상소학교로 바꿔 일본 ‘내지’와 일치시켰고 1941년에는 재차 국민학교로 변경했다.

1940년대 시대의 현장은 ‘학교(School)’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37년 중일전쟁으로 이어지고 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전시체제를 구축했고 1943년 국민총동원령을 내려 조선에서도 징병·징용·공출을 강행했다. 창씨개명과 함께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는 등 동화정책을 강화하는 가운데 일제와 조선인의 접촉은 행정조직과 금융조합 등 수탈기구 외에 학교가 가장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정부수립과 국가건설(nation-building)에 대한 국민적 기대 때문에 교육열이 폭발적으로 높아졌고, 학교에 최우선순위가 주어졌다.

1950년대 시대의 현장은 ‘군대(Army)’였다. 전쟁이 3년 동안 지속되면서 엘리트 인적 자원은 자연스럽게 군에 집결하게 됐다. 전후 군대 조직이 단기간에 확대되고 위상이 높아진 것은 물론 미군의 행정기법과 교육훈련, 장비기술을 전수받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앞선 조직이 되었다. 임무수행 능력이 기존의 일본식 행정조직을 능가하는 것은 물론, 소장파 군인들은 자신들이 한국사회를 풍미했던 부패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1960년대 시대의 현장은 ‘정부(Government)’였다. 1961년 5·16쿠데타와 함께 군인들이 관료조직을 장악했고 경제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원래 자유당 정권이 기안한 것이고 미국이 쿠데타 추인의 조건으로 권고한 것이기도 했지만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성공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미 케네디 대통령의 차석 안보보좌관 로스토우(Walt Rostow)의 근대화론과 경제발전 단계론은 당시 미 대외정책의 근간이었고, 군대·지식인·기업인을 신생국가 근대화의 3대 주체로 꼽았다. 60년대는 군이 정부에 들어와 관권개발을 주도한 시기였다.

1992년 말 김영삼 정권 취임을 앞두고 교통부 기자실 냉주 송년회에서 장관에게 “언제 공직에 들어왔느냐”고 물었더니 1961년이라고 답했다. “군사정권과 함께 시작했다 군사정권과 함께 끝나는군요”라고 했더니 ‘급실색’을 하는 것이었다. 위로하는 차원에서 “그래도 공무원들이 나라 발전에 많이 기여했지요”라고 건넸더니 금세 화색이 돌며 60년대 밤잠 안 자고 일했다며 자랑하는 것이 아닌가. 조금 얄미운 생각이 들어 “공무원이 잠 푹 자고, 규제와 간섭을 덜 열심히 했으면 국가가 더 발전됐을 걸요”했더니 도로 울상이 되고 말았던 적이 있었다.

1970년대 시대의 현장은 ‘대기업(Chaebol)’이었다. 한국 재벌의 뿌리는 해방직후로부터 비롯했고 50년대 전쟁과 전후복구시대를 겪으면서 성장을 했지만 주요 경제주체로 발돋움을 한 것은 60년대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수입대체산업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한국 재벌이 정작 날개를 달고 세계적 기업으로 비약한 것은 1973년1월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육성선언 이후였다. 1976년 현대건설은 주바일 항만공사를 9억3,000만 달러에 수주했는데 한국 국가예산의 30% 규모였다. 당시 대졸자들은 공무원이나 은행원, 교사보다 대기업 입사를 선호하는 분위기였다.

1980년대 시대의 현장은 ‘감옥(Prison)’이었다. 광주항쟁은 모든 것을 바꿨다. 전두환 정권 때는 고시 공부하는 것을 백안시하는 사람이 많았고 대학생들은 의식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단순히 시위하는 정도를 지나 투옥 경력이 있어야 훈장을 단 것쯤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일자리에 취업을 하기보다 노동현장에 가서 사회변혁을 위한 노동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젊은이도 적잖았다. 그 유명한 ‘386세대’는 감옥에 다녀온 명문대 출신들이 1990년대 이후 국회의원과 장관이 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요새는 소송을 통해 거액의 보상금을 챙기고 있다.

1990년대 시대의 현장은 ‘언론(Media)’이었다. 민주화와 더불어 언론의 영향력은 하늘을 찔러 <월간조선>은 ‘한국은 언론왕국’이라는 특집기사를 싣기도 했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다 소셜미디어도 등장하지 않아서 종이 신문이 정책을 좌우하고 누구든 TV 9시뉴스에 한번 나오면 전 국민이 알아보던 시절이었다. 기자의 보수와 사회적 지위도 가장 높아 인재가 몰려들고 언론사 입사시험이 언론고시라 불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중앙일보> 기자였던 동기가 계열사인 삼성전자로 발령이 나자 좌천이라고들 했다.

2000년대 시대의 현장은 ‘광장(Plaza)’이었다. 2002년 효순·미선이 사건에 항의하는 촛불시위와 2008년 광우병 시위는 참여민주주의가 정치적 지형에 편입되는 일대 사건들이었고 광장이 그 상징이자 공간이었다. 광장의 세력이 정치권력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문화권력을 장악했고 젊은 세대의 의식을 지배했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북한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거나 공개 비판하는 것은 ‘쿨’한 행동이 아니었다. 2000년대 이전에는 연예인들의 정치간여는 대부분 기득권 편에 가담했는데, 광장문화가 보편화하면서 운동권 성향의 연예인이 한때 다수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2010년대 시대의 현장은 어디일까. 외국인 유학생들은 ‘IT회사’ ‘한류 무대’ ‘가상공간’ 등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다 일리가 있지만 내 생각엔 2010년대의 현장은 한국 젊은이의 글로벌화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글로벌화는 단순한 외국 여행이나 탐방, 연수나 유학과는 다르다. 지금 한국에는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s)가 자꾸 줄어들기 때문에 외국에 나가서 먹고 살길을 적극적으로 찾는 젊은 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글로벌화하는 한국 젊은이를 상징하는 장소는 과연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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