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3일] 베이징 대학생 시위

1986 베이징 대학생 수천 명 민주화 시위

1986년 12월23일 중국 북경 소재 청화대 학생 4000여명과 북경대학생 3000여명이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같은 달 9일 합비(合肥)에서 시작된 학생 데모가 호북성과 호남성, 운남성에 이어 상해로까지 확산, 이날 중국 수도 베이징에서도 대규모 가두시위가 이어진 것. 시위는 인민대표대회위원의 비민주적인 선거로부터 비롯됐다. 북경시내 대학생들의 요구사항은 ‘폭넓은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였다. 중국공산당의 요람이자 문화혁명의 근원지인 상해에서는 학생 수만 명 이외 노동자들도 시위에 가담했다.

당시 대학생 시위로 중국 사회는 ▲관료들의 부정부패 ▲개혁 및 개방의 범위와 속도 ▲자유의 범위 등을 둘러싼 논쟁에 휘말렸다. 공산당 지도부와 학생, 지식인 간의 의견차이가 극명하게 부각됐고, 1989년까지 이어진 이런 논쟁은 그 해 6월 무자비한 진압과 함께 ‘천안문 사태’로 매듭지어졌다.

1973년 호주 백호주의 철회

1973년 12월23일은 호주가 “유색인종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이른 바 ‘백호주의(白濠主義ㆍWhite Australiaism)’를 철회한 ‘신(新)이민정책’을 발표한 날이다. 더 이상 노동력과 소비수요 부족에 따른 저성장 경제를 감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백호주의는 1850년 당시 황금을 찾아 이 대륙으로 사람들이 몰려들던 때 시작됐다. 중국인들은 백인보다 금광을 잘 찾아내 부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 황제 빌헬름2세가 1895년 황화론(黃禍論)을 제기했다. 아시아인이 유럽문명에 위협이 된다는 주장이다. 아시아인에 대한 학살이 자행됐고 연방정부 수립(1901년) 이후 ‘백호주의’ 이민법이 만들어졌다.

1948년 일본 A급 전범 도조 처형

진주만 공격을 총지휘 했던 일본의 전쟁 범죄자 하데키 도조(Hideki Tojo).

1948년 12월 23일 이른 아침, 일본의 A급 전범 도조 히데키(1884∼1948)를 비롯한 7명이 도쿄 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진주만 공습으로 침략전쟁을 주도했고 미국(필리핀) 영국(홍콩) 프랑스(인도차이나)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영토를 침략했으며 전쟁포로를 학대 처형했다는 죄목이었다.

도조는 1941년 총리가 된 뒤 진주만 기습 공격을 지휘해 결국 자신의 조국을 패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식민지 한국에서 징병제와 학도병 지원제를 실시한 인물도 그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부터였다.

1946년 5월3일 처음 열린 도쿄 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자 25명 전원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도조는 자신의 범죄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스스로 반인류적 전쟁 범죄자임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자살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사형선고 직후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한 히틀러의 오른팔 헤르만 괴링은 도조보다 행복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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