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선윤의 일본이야기] 봄날씨

<그림=박은정>

4월이라 꽃도 폈는데 매섭게 춥다. 부지런하게도 겨울 코트를 다 정리한지라 입을 것도 없다. 거울 앞에서 한참 고민하다가 파스텔 톤의 봄 스웨터를 걸치고 안으로는 겨울에도 입지 않았던 내복을 꺼내 입는다. 봄이 되면 차가운 시베리아 고기압이 쇠퇴하다가 갑자기 다시 확장되면서 추워지는 날이 있다. 봄기운 완연한 가운데 불현듯 나타나는 이런 변덕스러운 추위를 꽃샘추위라 한다. 아마도 ‘봄꽃 피는 걸 시샘하는 추위’라는 뜻일 게다. 참 심술도 여러 가지라 생각하면서도 이 예쁜 단어에 많은 이야기를 담아본다. 봄꽃이 얼마나 예쁘기에 바람까지 불어 꽃샘바람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하나-비에(はなびえ, 꽃 추위)

일본에도 이와 비슷한 단어가 있다. ‘하나-비에’다. 시샘한다는 재미난 스토리는 없지만 벚꽃이 필 무렵 갑자기 찾아오는 추위를 말하는 것이니 우리의 꽃샘추위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꽃도 추워한다는 뜻인지, 단순히 말 그대로 꽃 필 무렵의 추위를 가리키는 것인지 여하튼 ‘꽃’이라는 단어가 있는 것만으로 봄날의 고약한 추위를 사람들은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그러고 보니 봄날은 숫처녀 마음처럼 참 얄궂다. 꽃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갑자기 추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흐렸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날도 많다.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이럴 때마다 사람들은 예쁜 단어로 감싸 안는다.

하나-구모리(花曇, 꽃 흐림)

길게 늘어진 가지마다 꽃들이 살포시 앉아서 재잘거리는데 하늘은 온통 부옇게 흐리다. 벚꽃이 피는 때가 되면 이런 날이 많다. 사람들은 울적해지는 마음을 잠시 접고 ‘하나-구모리’라는 예쁜 말을 가지고 마음을 달랜다. 입을 쑥 내밀고 이유 없이 심술부리는 어린 여자아이를 바라보는 것만 같다.

우리는 봄에 꽃이 한창 필 때를 양화천(養花天)이라 한다. 꽃이 피는 날에는 흐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은데 이는 꽃을 피우기 위한 것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하나-구모리’는 양화천의 일본말이 분명하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엷은 그늘은 꽃을 기르기 위한 하늘이라는데.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을 보니 뿌연 하늘이 울적하지만은 않다. 벚꽃은 7일의 짧은 생명이라 ‘하나-나누카(花七日)’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피라고 하늘은 커튼을 치고 강한 봄빛을 막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집불통 뽀로통한 아이가 이제야 피식 웃는 것 같다.

나다네-즈유(菜種梅雨, 유채꽃 장마)

일본은 비가 많은 나라다. 4월 시작을 전후해서 오랫동안 비가 내린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가 아니라 좀 더 세게 쏟아지는데 그렇다고 여름 전 본격적인 장마 정도는 아니다. 반갑지 않은 봄장마 춘림(春霖)을 사람들은 역시 예쁜 말을 가지고 맞는다. ‘나다네-즈유’란다.

꽃을 재촉하는 비라는 뜻을 가진 최화우(催花雨)라는 말이 있다. 일본어 발음상 ‘催花=さいか=菜花’인지라 최화우(催花雨=菜花雨)를 ‘나다네-즈유’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하튼 유채꽃 피는 시기에 내리는 긴 비를 이렇게 말한다.

조용히 비가 내리고 녹음은 더 짙어진다. 이렇게 봄날은 하루하루 지나간다. ‘나다네-즈유’가 끝나고 5월이 시작되면 다시 ‘다케노코-즈유(たけのこ梅雨, 대나무 장마)’가 찾아오고, 5월 중순에는 ‘우노하나-쿠타시(卯の花くたし, 매화말발도리 썩이는 비)’가 이어진다. 그리고 매실이 익어갈 때 본격적인 장마 ‘쓰유(梅雨, 「바이우」라고도 함)’가 시작된다.

봄날의 비는 성가시기는 하지만 그래도 마음마저 눅눅해지는 그런 것은 아니다. 봄을 재촉하고 꽃을 재촉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꽃 이름을 가지고 ‘비’를 맞이했다.

봄은 특별하다

봄은 특별하다. 그래서 특별한 단어들이 많다. 4월의 바람을 ‘가제-히카루(風光る, 바람 빛나다)’라고 한다. 봄볕에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은 바람에도 빛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춥지도 덥지도 않은 화창한 봄날을 특별히 ‘하루-우라라(春うらら, 화창한 봄)’라고 하고, 3월 초에 처음으로 부는 강한 남풍을 ‘하루-이치방(春一番, 봄 처음)’이라며 봄의 시작을 뜻한다. 휘파람새는 봄을 알리는 새라는 뜻으로 ‘하루쓰게-도리(春告げ鳥, 봄을 아리는 새)’라 하고 청어는 ‘하루쓰게-우오(春告げ魚, 봄을 알리는 불고기)’라 한다.

초목이 일제히 싹을 틔우면서 녹음이 우거지고 밝게 빛나는 모습을 ‘야마-와라우(山笑う, 산이 웃는다)’라고 형용한다. 북송의 화가 곽희의 화론에서 비롯된 말이라는데 여하튼 산이 웃는다고 형용되는 봄은 특별하다. 우리나라도 일본도 봄은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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