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중동’ 공식에서 벗어나자

터키, 이란문화 있어도 중동문화는 없어

역사 속에서 우리는 중동 사람들과 여러 경로를 통해 만나왔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가 당나라 군사를 이끌고 탈라스강변으로 가 사라센 군인들을 만났고, 장안에서는 신라와 서역의 상인들이 어울렸으며, 개경을 내 집 드나들 듯 하던 회회인들이 수만을 헤아렸다.

사람만 오간 것이 아니다. 신라인들은 왕릉 주변에 서역인의 석상을 세웠고, 개경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아락주를 마셨다. 세종대왕 앞에서 축사를 낭송하던 무슬림 대표의 예에서처럼 우리는 중동지역에서 온 사람들과 줄기찬 만남을 가져왔다. 한동안 잊혔던 그들을 다시 만난지 이제 반세기가 됐다.

여러 중동국가 중 이스라엘은 보통 국제정치적 ‘중동문제’의 한 축으로 여겨질 뿐이고 ‘중동문화’의 내용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슬람 중동’이라는 고정관념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아랍 국가들이야 아랍어를 모국어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공통점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란이나 터키는 각각의 모국어가 따로 있으니 사실상 여타 아랍 국가들과 중동이라는 하나의 틀로 묶이게 되는 이유는 이슬람역사를 공유한다는 점, 그리고 현재 이슬람을 신봉하는 국민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중동은, 말하자면 모자이크 사회다. 어떤 유기체적 결합을 통한 동질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이다. 중동 국가 각각은 자연환경 뿐 아니라 역사발전 과정, 의식이나 정치경제 상황이 모두 상이하다. 그러니 ‘중동문화’라고 뭉뚱그려 부를 수 있는 것의 존재여부에 대한 의문마저도 제기하게 된다.

터키문화, 이란문화는 있어도 중동문화는 없다는 것이다. 이슬람으로 인해 중동 각국이 서로 무척 비슷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정치적으로 통일된 국가 모양새를 갖춰본 적이 없다. 더구나 19세기와 20세기를 가로지르며 위세를 떨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입맛에 따라 강제로 쪼개진 후 분열의 양상이 견고해지기만 했다.

그러면 중동을 하나로 아우르는 단 하나의 문화적 양상이라 할 수 있는 이슬람에 대해 잠깐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전근대적이고 후진적 종교라는 인상을 얻고 있지만, 가톨릭의 뒤를 잇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교세를 가진 종교가 이슬람이다. 13억 명이 넘는 교인을 가진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종교라는 말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한 종교가 세계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종교가 무척이나 비도덕적이고 반인도적일 수 있을까?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무슬림의 절반은 여성이다. 여성을 억압하고 학대하는 종교가 어떻게 보편종교가 될 수 있었을까?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항상 괴리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보통 무슬림을 통해 이슬람을 이해하려 한다. 여기에서 많은 오해가 생겨난다. 기독교인을 통해 기독교를 이해하려 하는 순간 생기는 오해와 같은 것이다.

이슬람은 매우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생겨나 유지되고 발전하였다. 어느덧 1400여 년 전에 배태된 이슬람의 혁명적 이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1400여 년 전의 외연만을 앵무새처럼 외쳐대는 가부장 문화가 이슬람의 정신을 가장하여 행세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슬람이 사회 내에서 기능하는 정도도 지역과 나라에 따라서 많이 다르다.

그리고 중동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이슬람이 미치는 영향을 우리가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볼 문제다. 예를 들어, 중동국가들과 국가대표급 축구경기를 자주 치르고 있는데, 그들이 축구하는 방식을 ‘이슬람식’ 축구로 봐야 하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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