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49회 “코끼리 생각”

며칠 동안 새벽마다 비가 내렸다. 먼 산 계곡에서는 물이 쏟아져 흐르고 숙소 가까이 오솔길은 온통 안개에 잠겨 있었다. 나무들은 소리 없이 비에 젖어들 뿐 초록빛으로 뒤덮인 열대의 숲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길가에는 건기가 곧 시작될 것을 알리는 듯 푸릇푸릇한 대나무 싹이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었다. 무성한 잡초와 썩은 나뭇가지로 뒤덮인 개울가를 지나 수풀 안으로 들어가니 시냇물 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불어난 개울물이 큰 소리를 내며 둔덕을 훑고 있었다. 기준은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링크빌리지에 들어온 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마을에 도착한 뒤 기준은 루앙이 주관하는 공사를 거드는 한편 휴게소 기능을 개선하는 쪽으로 힘을 쏟겠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링크빌리지에 정작 링크 기능이 빠져있었네요.” 루앙은 마침 잘 되었다며 기준의 제안을 환영했다. 기준은 명칭이야 어찌되었든 자신에게 맡겨진 파트너십 기획자의 역할은 주민들에게 필요한 일을 주민과 함께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을 청년들과 자원 봉사자들의 대부분이 자연 치유 센터를 위한 체험 농장을 만드느라 여유가 없었던 터라 주민들 역시 기준의 동참을 반겼다.

기준은 우선 휴게소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마을 설계도를 조정하고 라오스 담당 관청에 제출할 제안서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루앙이나 안젤라, 그리고 주민들과도 틈틈이 의견을 나누며 계획안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래 전 건축사무소에 근무하던 시절 밤을 새우며 설계 제안을 작성하던 그 때로 되돌아간 듯 가벼운 흥분까지 느꼈다. 루앙이 초를 잡아둔 설계안을 바탕으로 수정하는 일은 기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휴게소 설치의 전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버스 터미널의 지정이나 최소한 공식 정류장의 지정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그런데 라오스 정부의 경제 형편으로 볼 때 이 문제는 외부 투자와 연계가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루앙이나 마을 주민들이 기준의 동참을 환영하고 나선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기준이라고 해서 뚜렷한 해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사이트라오스 프로젝트가 적극적으로 추진된다면 모르겠지만, 리조트에는 강 전무 주변을 비롯해 링크빌리지와의 연계 프로젝트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고 무엇보다 그룹의 경영 환경에 빨간 불이 켜진 상황에서는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기준이 이 일에 매달릴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언제 다시 리조트로 복귀하라는 명령이나 또 다른 지시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고, 위앙짠의 관리에게 보여 줄 버스 터미널과 휴게소 상업시설 유치 계획서도 계속 이상 미룰 수 없는 형편이었다.
두 달 여 전에 제대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카이손 아마스를 만났을 때, 그동안 루앙의 끈질긴 요청에 이골이 난 때문인지 몰라도 카이손은 예상 외로 링크빌리지의 제안에 관심을 보였었다. “우리는 절차에 따라 실사를 하여 결정을 내릴 겁니다. 투자청과 협의도 해야 하니 일단 정식 제안서부터 제출하세요.”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다.

낮 시간은 청년들과 함께 노동을 하고 해가 지면 제안서 내용을 보완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야말로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는 주경야독 생활이 이어졌다. 몸은 피곤했지만 정신은 더욱 예리해졌다. 알고 보니 그러한 생활의 패턴은 대다수 마을 청년들의 삶과 비슷했고 무엇보다 루앙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기준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라오스 사람들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체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준은 제안서 작성 외에도 일주일 마다 링크빌리지의 개발 진행 상황이나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여 리조트에 보고했다. 기준을 파견한 사람의 속마음에 상관없이 기준은 리조트를 대표하여 링크빌리지와의 파트너십을 개발하는 역할에 성의를 다하고 싶었고, 그것이 인사이트라오스 프로젝트를 살리고 모두를 위하는 길이라 생각한 터라 가능한 한 충실하게 보고서를 작성했다. 리조트에서는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계속 수고하라’는 짤막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하지만 강 전무에게 특별한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아니 제안서를 완성하기 까지는 오히려 특별한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에 기준은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땡볕이 기울어갈 즈음 러닝셔츠 차림으로 장비를 움직여서 땅을 고르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김 형, 완전히 라오스 사내가 다 되었네.”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변형섭이었다. “아까부터 쭉 지켜봤는데 김 형을 이곳에 보낸 강 전무의 결정이 탁월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건 무슨 말이야?” 기준이 환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윗분들의 심오한 뜻은 잘 모르겠지만, 리조트에 있을 때보다 훨씬 생기가 있어 보여서 말이야.”
기준은 마을 청년에게 트랙터를 넘겨주고 공동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고서는 잘 읽고 있어. 전무님이 아직 별 말씀 없으시지만 이렇게 나를 보낸 걸 보면 관심이 많으신가봐.” 형섭은 강 전무가 위로 차원에서 자신을 보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버스 터미널 지정을 추진한다고 썼던데.”
“링크빌리지가 하루빨리 링크 기능을 제대로 갖춘 경유지로 완성되어야 해. 터미널은 장기적인 목표고.”
“솔직히 정류장 지정도 쉽지 않아 보이는데.”
형섭 특유의 시니컬한 말꼬리가 거슬렸지만 기준은 웃어넘겼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 거야.” 기준은 앞에 놓인 쌀국수에 고춧가루와 레몬즙을 듬뿍 뿌려서 후루룩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기 시작했다.
“여기 링크빌리지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모습이 상상이 안 돼. 그러니 앞으로 이곳이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장소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어.” 몸을 쓰는 일을 한 뒤라서 그런지 기준은 이 맘 때만 되면 항상 시장기를 느꼈다. 어느새 한 그릇을 비웠다. 형섭은 몇 젓가락 뜨던 제 국수를 기준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사람들이 라오스에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라오스 사람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기준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건 보고서에는 없는 내용인데.” 형섭이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변 형, 보고서를 대충 읽었나 보네. 행간을 읽어주셔야지.”
형섭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각종 채소가 먹음직스럽게 들어간 료카오 전병을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여기 땅콩소스가 정말 맛있네.”
“사람들이 라오스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그건 관계의 회복이라는 생각이 들어. 사람들 사이의 관계 회복,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 회복 말이야. 링크빌리지는 지역과 지역 사이를 이어주는 링크의 역할을 하려고 하지만 종국에는 사람들이 잊고 있는 관계의 회복에 도움을 주려고 하지. 여기에 만들려고 하는 휴게소나 정류장은 사이를 이어주는 그런 의미가 있어. 터미널 역시 그런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고.”
“아, 그래서 모두들 자연 치유 센터며 체험 농장에 매달리고 있는 것이었군.” 형섭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빌리지 주변의 숲은 언제나 어둠이 일찍 찾아온다. 개울 건너편의 우거진 대나무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어둠이 재빠르게 숲 밖으로 몰려나왔다. 노을마저 어둠에 자리를 빼앗겼다. 짧은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링크빌리지에 대한 소개도 할 겸 오솔길 산책을 마친 두 사람은 기준의 숙소로 자리를 옮겨 술을 한 잔 하기로 했다.
“요즘 리조트 분위기는 어떤가?” 맥주를 따르며 기준이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총지배인님이 자주 사무실에 나오셔서 그런지 리조트는 평안한 편이야.”
“자주 나오신다고?”
“나오시면 주로 강 전무님하고 이야기를 나누시지만. 총지배인님이 리조트 경내에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직원들은 안심이 되는 가봐.”
링크빌리지에 온 이후 몇 주 동안 기준은 총지배인을 만나지 못했다. 가끔 병원을 오가는 안젤라를 통해 전해들을 뿐이지만 안젤라 역시 최근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다.
“폭풍 전의 고요함이랄까, 별 일 없이 잘 돌아가. 단지, 자네가 사라진 다음에 인사이트라오스 프로젝트도 함께 실종되었다는 사실 빼놓고는 말이야.” 형섭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토를 달았다.
‘인사이트라오스의 실종.’ 기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밖에서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서 트랙터 엔진이 신음소리를 내듯 그르렁 거렸다.
“내 생각에는, 인사이트라오스는 어느 한 사람이 활약해서 단기성과를 내는 그런 종류의 프로젝트가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아. 리조트 식구들 모두가 공감하는 조직 문화로서 인사이트라오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몇몇 개인의 영웅적인 활약이 없더라도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기준은 변형섭의 말이 반가웠다. 누군가 여전히 인사이트라오스를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어제 밤에 잠이 안 오더군. 솔직히 자네 혼자 너무 멀리 앞서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해서 말이지.” 기준은 말없이 형섭을 마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도 배신감을 느낄지 모르지만, 그동안 내 관심은 업무 프로세스에 국한되어 있었어. 어떻게 하면 일하는 절차를 개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일하는 방식을 효과적으로 조직할까, 그것만 생각해도 머리가 지끈거렸지. …… 자네와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솔직히 왕위왕 지역의 고립 문제를 해결하고 현지인과의 교류나 연계 프로젝트를 개선하는 등의 말들은 나에게 별로 와 닿지 않았어. 아니, 그런 문제들까지 고민할 여유가 없었어.” 형섭의 이야기가 살짝 방향을 틀고 있었다. 기준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전에 말했잖아. 이상적인 조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시스템……. 새로운 전략이 생길 때마다 구성원 모두가 한 뜻으로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조직, 그래서 때로는 기대했던 목표를 초과 달성할 만큼 자발적으로 협력할 줄 아는 그런 조직 말 이야.”
“그런 시스템을 만드는 게 변형의 꿈이었지. 물론 그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변형섭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역시 자네는 제대로 알고 있었군. 나는 그 동안 꿈을 꾸고 있었어. 현실이라는 이름의 단단한 껍질, 합리적 사고라는 멋진 포장 속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고 있었어. 이를테면 공상에 빠져 있었던 거지. 내가 정해 놓은 한계 안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려고 했어. 그리고 그걸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그렇든 아니든 상관없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잠에 깨어 보니 문득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느낌, 자네 그런 느낌 아는가?”
기준은 형섭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평소와 달리 그는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사실은 이거야. 내가 자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거든. 그게 뭐냐면……, 신기하게도 김 형이 떠나고 나서야 내가 원하는 것과 인사이트라오스가 별개의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단 말이야.”
기준은 형섭의 속내를 알 수 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니 마땅히 대답해줄 말을 찾기도 어려웠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리고 논리를 동원해도 답이 보이지 않을 때, 그때가 바로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 나서야 할 때지. 그렇지 않아?”
“획기적인 방법을 찾아 나선다고?”
“그렇지. 지금이야말로 코끼리를 찾아 나설 때라고 생각해.”
“갑자기 코끼리를 찾아 나선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오늘은 이상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군.”
“오래 전 고대에는 중국 땅에서도 코끼리가 살았는데, 후대에 기후 조건이 바뀌면서 코끼리들이 모두 남쪽으로 이동하고 중국에서는 더 이상 코끼리를 볼 수 없게 되었지. 그러자 사람들은 코끼리의 뼈와 가 얼마나 큰지 코끼리의 코가 얼마나 근사한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었어. 그들이 코끼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화석으로 남아있는 코끼리의 뼈를 보고 생각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하네.” 형섭의 설명이 그럴 듯 했다.
“아하, 그러니까 생각 상(想), 코끼리 모양 상(像) 자를 써서 상상(想像)이라는 단어가 생겨났다는 이야기로군.” 형섭이 코끼리를 찾아 나서겠다고 한 말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지금이야말로 상상력을 발휘할 때야. 자네가 언젠가 말했듯이, 합리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틀을 깨고 도약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그렇다고 합리성을 버려서는 안 될 거야. 상상이나 창조는 일회적인 기발함이나 무분별한 공상하고는 다르니까.”
“합리성의 한계를 극복한다고 비합리를 자초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겠지?”
“물론이야. 비합리와 초합리는 엄연히 다르잖아. 비합리가 아직 합리의 단계에 이르지 못한 미숙한 단계라면 초합리는 합리를 품어 안고 하늘을 나는 것이지. 합리적 계산의 방법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어려운 딜레마를 풀기 위해서는, 합리적 바탕 위에서 합리성을 극복해야 해. 그래서 초합리인 것이지. 그래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고. 초합리는 합리를 그냥 초월해서 합리를 버리고 맨 몸으로 나는 것은 아니야. 그런 식이라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물론 합리를 버리면 날개 없는 추락이 있을 뿐이지만.” 열변을 토한 기준이 단 숨에 잔을 비웠다.
“하하, 역시 김 형은 아직 살아있군. 자네나 나나 우리는 리조트라는 한계, 그걸 깨야 할 거야.” 형섭이 잔을 높이 들었다.

며칠 후 루앙과 제안서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형섭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형, 좋지 않은 소식이야.”
“왜? 아직 코끼리를 못 찾았어?” 기준이 농을 던졌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전화기에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본사에서 김 형 앞으로 인사 명령이 내려왔어. 귀국하라는 지시야.”
“…….”
“본사 귀환?” 기준은 담담한 심정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 지금 엄청 열 받았거든? 강 전무한테 항의 하러 갈 생각이야.” 형섭이 씩씩거렸다. “이런 식으로 퇴출시킬 거라면 김 형 보다 먼저 내가 리조트를 떠나고 싶어.” 형섭은 격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변형, 강 전무하고 부딪히지 마.” 기준은 화가 나지도 가슴이 울렁거리지도 않았다. 기준은 전에 없이 냉정해지는 자신이 신기했다.
전화를 끊은 뒤 기준은 씁쓸한 표정으로 루앙을 바라보았다.
“떠날 때가 다가온 것 같군요.”
기준의 말에 루앙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총지배인님을 먼저 만나보세요.” 루앙은 마치 어떤 이유라도 있다는 듯이 간곡하게 말했다.
‘퇴출.’ 형섭의 말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본사로 귀환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리조트와 링크빌리지의 장래가 달려있는 이 중요한 시점에 본사로 귀환 명령을 내리는 행위는 퇴출 이외의 다른 용어로 규정하기도 힘들 것이다.
기준은 면밀하게 진행되어온 지난 과정을 되돌아보며 자신을 퇴출시키려는 자들의 생각을 가늠해보았다. 소문, 격리, 그리고 본사 귀환……, 그리고 다음은? 그렇다면 이제 다음 절차는 리조트 매각일까. 정해진 수순에 따라 프로세스를 밟아가기 위해 그들은 걸림돌을 하나하나 치워내고 있는 것인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자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선 기준은 오솔길을 지나 대나무 숲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누군가 기준의 뒤를 따르던 걸음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추적추적 이슬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기준은 우울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개울물을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아무 생각도 욕망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졌다.

이튿날 아침 기준은 왕위앙 병원으로 향했다. 기준 역시 총지배인을 만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총지배인은 병원에 없었다. 안젤라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습니까?”
“리조트에 가셨어요.” 간호사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리조트? 언제요?”
“두 시간쯤 됐어요.”
서둘러 차에 시동을 걸기가 무섭게 휴대폰이 울렸다. 변형섭이었다.
“김 형, 지금 어디야?”
“왕위앙에 와있어. 병원이야.”
“잘 됐군. 빨리 와. 총지배인님이 여기에 계셔.”
“나를 찾으셔? 아니, 무슨 일이 있나?”
“잘 모르겠어. 총무팀 이야기로는 오늘 중으로 뭔가 중대발표가 있을 거라는데.”
기준은 전화를 끊고 가속페달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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