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의 재발견] 타인 똥은 어떻게 15세기 베트남전성기를 이뤘나?

타인 호아 지역 레 왕조 태묘(太廟)에 전시되어 있는 타인 똥 황제의 초상화

1490년대 후반에 베트남을 통치하고 있던 황제 타인 똥(Th?nh T?ng, 聖宗, 1442-1497, 재위 기간 1460-1497)은 재위 말년 <경원구가시집>(瓊苑九歌詩集, 1495), <고금백영시>(古今百詠詩, 1495), <춘운시집>(春雲詩集, 1496), <고금궁사시>(古今宮詞詩, 1496) 등을 발간하며 그간 ‘이런저런’ 이유로 자제해 왔던 시작(詩作) 활동을 즐기며 여생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일국(一國)의 책임감 있는 지도자라고 하기에는 다소 느슨하면서도 여유롭게 삶을 즐기는 것으로 보이는 이 황제는 과연 어떠한 업적을 통해 베트남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게 된 것일까?

조선왕조가 창건된 지 36년째 되는 해인 1428년 베트남을 명(明)의 지배(1407-1427)로부터 구해 낸 레 러이(黎利, 1385-1433)는, 타인 호아(淸化) 출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동 낀(東京, 현재의 하노이)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이 비엣(大越)이라 하고 새로운 레(L?) 왕조(黎朝, 1428-1788)를 창건했다. 조선에서는 제4대 왕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기간 1418-1450)이 다양한 영역에 걸쳐 업적을 많이 남겨 현재에도 성군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면, 베트남에서는 레 왕조의 제4대 황제 타인 똥이 바로 비슷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제2대 황제 타이 똥(太宗, 1434-1442 재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제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던 타인 똥은 어떠한 과정을 거쳐 황제로 등극할 수 있었을까? 타이 똥의 장자이면서 태자로 책봉되었던 응이 전(宜民)은 생모 즈엉(楊)씨(氏)가 질투가 많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서인(庶人)이 되는 바람에 계승권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후 1459년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 이복동생 년 똥(仁宗, 1443-1459 재위)을 살해하고 정권을 차지했다. 이 과정에서 점차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기 시작한 타인 호아 출신 개국공신들은 1460년 6월 ‘반정(反正)’을 일으켜 응이 전과 그의 추종자들을 몰아내고 타이 똥의 넷째 아들 하오(灝)를 황제로 추대하게 되었다. 이 황제가 바로 타인 똥으로, 그의 치세 동안 베트남은 대내적으로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역사상 보기 드문 안정과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우선 대내적으로 타인 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어떠한 국정 수행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조정에서 전개된 권력 다툼과 무기력했던 황제들을 목도(目睹)해야만 했던 그는 명의 제도를 도입하여 당시까지 막강하던 대장군(大將軍)과 대신(大臣)의 직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기존의 육부(六部) 기능을 강화하여 황제의 직속기관으로 만들면서 친정체제(親政體制)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12개의 도(道, 1471년 이후에는 13개)로 개편된 지방 행정 조직에는 승사(承司), 헌사(憲司), 도사(都司)가 설치되어 행정권, 감찰권, 치안권이 분산되었다. 아울러 촌락의 지도자인 사장(社長)을 촌민들이 직접 추천하게 함으로써 지방관의 권력 집중화 현상을 방지하는 한편, 촌락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고자 했다. 타인 똥은 이러한 제도 개혁을 바탕으로 1460년부터 호적 작성을 본격화할 수 있었고, 1470년부터 정기적으로 토지조사를 실시해서 토지대장인 전부(田簿)를 작성하여 수정, 보완하도록 했다.

11세기에 창건되어 현재까지도 보존되고 있는 하노이의 문묘(文廟)

산업 진흥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던 타인 똥은 제방의 수리나 관개시설을 정비하기 위해 1474년 하제관(河堤官)과 권농관(勸農官)을 신설하여 농업을 장려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부관(戶部官)과 승정관(承政官)을 통해 부(府)와 현(縣) 단위에서 진행되고 있던 황무지 개간과 간척 사업을 독려하고, 그 결과를 토지 면적 측량을 통해 보고하도록 했다. 특히, 변경 지대에 설치된 둔전(屯田)을 통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농민들이 평상시에는 농업에 종사하고 전시(戰時)에는 병사로서 싸움에 임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었다. 또한, 농업 이외에도 광산을 개발하거나 양을 장려하기 위한 각종 정책이 시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1477년에는 전국의 현(縣), 주(州), 촌락[사(社)]에 새롭게 시장을 개설하여 물자의 유통과 판매를 활성화함으로써 국가 경제에 생기를 불어 넣고자 했다.

타인 똥의 치적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은 현존하는 베트남 최고(最古)의 성문법인 <국조형률>(國朝刑律, 일명 黎朝刑律)의 편찬이다. 당률(唐律)을 기본으로 베트남 고유의 관습법과 사회제도 등을 반영하고 있는 이 법은 충과 효를 강조하며 군주의 권익을 옹호하고 있는데, 형벌체계가 남녀에 따라 달리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국조형률>에 포함되어 있는 부인의 재산권 보장 조항, 딸의 재산 상속권 및 제사 상속권 조항 등을 고려한다면, 타인 똥은 중국법과는 차별적인 베트남의 전통적인 규범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484년 당시 자의에 의한 혹은 타의에 의한 무분별한 낙태를 엄금한 타인 똥의 사회 정책은 과거의 폐습을 개혁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리고 베트남의 지적 분위기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평가할 수 있는 유학의 보급과 장려도 타인 똥 시기에 가시적인 성과를 보게 되었다. 즉위 초기인 1463년부터 기존에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던 회시(會試)를 적어도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했으며, 1467년에는 처음으로 오경(五經)박사를 두고 오경을 보급하기 시작했고, 또 국립대학도 증축하여 강의실, 도서실, 기숙사 등을 설치했다. 또 지식인들의 학구열을 고취하기 위해 회시 합격자인 진사(進士)의 명단을 발표할 때 엄숙한 궁중의식을 거행했고, 특히 1484년 이후에는 그들의 이름을 새긴 진사제명비(進士題名碑)를 문묘(文廟) 안에 세워 그 영예를 기리도록 했다.

타인 똥 황제가 1484년 처음으로 세운 진사제명비

이러한 타인 똥의 유학 정책과 관련하여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타인 똥 자신의 학문이 성리학(性理學) 중심의 유학적 흐름에만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위 초부터 “겉만 화려하고 쓸모없는 학문”(浮華無用之學)을 경계하라는 고관 응우옌 바 끼의 충고를 마음속에 간직하며 실용적인 학문을 중시하게 된 타인 똥의 도리관(道里觀)에 의하면, “도(道)는 당연한 일로서 명백하여 알기가 쉽고, 이(理)는 그렇게 된 연고로서 미묘하여 알기가 어렵다”(道者當然之事, 明白易知, 理者所以然之故, 微妙難見)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이’(理)를 규명하기 위해 ‘박학’(博學)을 표방한 타인 똥은 천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으며, 과거 시험에 “당대의 주요 사안(時務)”이나 “이학(理學) 및 수학(數學)” 관련 내용을 출제하기도 했다.

한편, 문화 정책과 관련된 타인 똥의 업적도 다양한 양상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유학을 통해 습득한 한문(漢文) 이외에 쯔 놈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1463년에는 신하들이 쯔 놈을 올바르게 사용할 것을 장려했으며, 1468년에는 민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용되던 쯔 놈 문자를 규격화하여 반포했으며, 참파 원정 당시인 1471년에는 전쟁 지침서의 내용을 쯔 놈으로도 간행하여 각 병영(兵營)에 내려 보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도 제작을 통해 국내 산천의 고금사적(古今事迹)을 보다 명확히 정리했으며(1467), 남진(南進)을 통해 새로 확장된 영토의 지명을 정리하는 작업에도 착수했다(1470).

대월사기전서

타인 똥은 명 지배기에 유실된 베트남 자료들을 복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경적(經籍)이나 전기(傳記) 등과 같은 서적들을 수집하여 편찬 사업에 활용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황제의 지시를 받은 응오 씨 리엔(吳士連)은 쩐 왕조(陳朝, 1225-1400) 때에 레 반 흐우(黎文休, 1230-1322)가 지은 <대월사기>(大越史記)에다 당시의 자료를 보완하여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 1479)를 발간했다. 건국신화에서부터 레 러이가 왕조를 세우는 1428년까지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이후에도 계속 속편이 간행되어 베트남 전통시대를 연구하기 위한 기본 사료로서 인정받고 있다. 타인 똥 때 이루어진 또 하나의 중요한 작품은 턴 년 쭝(申仁忠)과 도 뉴언(杜潤) 등이 편찬한 <천남여가집>(天南餘暇集, 1483)으로, 제도(制度), 율례(律例), 문한(文翰), 전고(典誥), 종교, 철학, 시, 산문 등 각 방면의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이처럼, 대내적으로 현실적인 각종 제도개혁과 사회, 문화 정책을 실행한 타인 똥은 대외적으로 동남아시아의 태국, 수마트라, 자바 등지와 우호적인 교역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직접 국경을 접하고 있던 인근의 참파나 라오스 지역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1470년 참파 왕이 수륙 10만의 군대로 베트남 남쪽의 호아 쩌우(H?a Ch?u)를 침범한 사건이 일어났다. 타인 똥은 유교화 정책으로 점차 중앙 정계에서 소외되고 있던 타인 호아 출신 무인들의 불만을 무마하고 홍 강 델타의 인구과밀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25만의 대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올라 이듬해 참파의 수도 비자야(Vijaya)를 점령하고 왕을 생포했다. 이 전투에서 참파군 6만을 살해하고 군민(軍民) 3만을 포로로 잡은 타인 똥의 원정군은 꾸 몽 관(지금의 꾸이 년 부근) 이북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이로써 마침내 오랜 세월 계속되던 양국의 대결은 타인 똥 시기에 이르러 베트남의 ‘성공적인 남진’(南進)으로 일단락되었다.

한편, 타인 똥은 남부 원정을 승리로 이끈 뒤에 서쪽으로도 친정(親征)에 나섰다. 원래, 쯔엉 산맥의 중북부 고원지대에 있는 라오스인의 부락 본 만(盆蠻)은 1434년부터 베트남에 입공(入貢)해 오다가 1448년에는 베트남에 귀속되어 꾸이 헙 주(州)가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베트남화’ 작업이 시행된 타인 똥 시기에 들어서는 꾸이 헙 주가 쩐 닌(鎭寧) 부(府)로 개편되고 부 이하에 일곱 개의 현(縣)이 두어지면서, 현지로 파견된 베트남 관리들이 해당 지역을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강한 불만을 품게 된 본 만의 지도자 껌(琴)은 루앙프라방(Luangprabang) 성(城)에 있던 란창(Lan Chang) 왕국과 함께 베트남의 서쪽 변경을 침공하는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타인 똥은 18만이라는 대병력을 이끌고 다섯 개의 루트로 공격하여 본 만을 토벌하고, 루앙프라방까지 함락시켰다. 이러한 ‘서진(西進)’을 통해 타인 똥의 다이 비엣은 유례없는 번영을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소수종족들로부터 조공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와 같이 15세기 후반의 베트남은 타인 똥의 대내 정책과 대외 정책을 통해 동남아 대륙부에서 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인 똥이 이룩한 당대의 성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타인 똥 이후에 등극한 황제들의 요절(夭折)이나 무능, 조정 내부 권신(權臣)들 간의 암투, 잦은 농민 봉기 등으로 인해, 레 왕조의 운명은 1527년 제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막당중(莫登庸)의 손으로 넘어갔다. 당시 황제의 중앙집권 강화와 문신 관료층의 지지 획득을 위해 레 왕조의 유교적 전통과 제도를 유지하고자 했던 막당중에게 타인 똥의 업적은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계승의 대상이었다. 타인 똥 때 만들어진 제도집(制度集)의 수정판 <황조관제전례>(皇朝官制典例)가 출간되고, 또한 타인 똥의 법령들이 <홍덕선정서>(洪德善政書)가 편찬된 사실을 고려한다면, ‘찬탈(簒奪)’ 정권에 의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던 타인 똥의 업적은 베트남 ‘전통시대’의 ‘과거’를 ‘현재적’ 입장에서 정리하며 ‘미래’를 위한 ‘모델’을 ‘현실적으로’ 제시했다는 측면에서 여전히 음미(吟味)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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