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48회 “사과나무”

? 새로운 항로

“기준 씨, 이제 그만해요.”
안젤라가 말했다.
“그만하라니, 뭘?”
“링크빌리지 말이에요. 거긴 루앙하고 나한테 맡기고 이제 기준 씨를 챙기세요.”
기준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다소 처량한 심정으로 리조트를 나선 뒤 기준은 링크빌리지로 가기에 앞서, 총지배인이 묵고 있는 왕위앙의 병원부터 찾은 터였다. 총지배인은 요사이 며칠 리조트에 출근하느라 무리를 했는지 깊이 잠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병원 마당의 그늘 막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여기서 그만두면 오해를 시인하는 꼴만 될 거야.”
기준이 말끝에 단호함이 묻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링크빌리지 개발, 인사이트라오스……, 이 모든 게 나의 개인적인 욕심에서 나온 거라는 오해.”

인사이트라오스 제안서에 대한 팀장들의 반응은 반반이었다. 취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하지만 실제로 가능하겠느냐는 현실성 측면에서 두 패로 나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준은 일단 변형섭과 리엔을 비롯한 몇몇 팀장들의 적극적인 지지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제대로 알릴 기회를 갖지 못하고 차일피일 시간이 지나던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도 기준의 제안이 확산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누군가의 손길이 움직인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해보니 복귀 준비를 하고 있는 총지배인, 언제부터인가 자기의 지시보다는 기준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는 몇몇 팀장들, 입만 열면 링크빌리지와의 파트너십을 강조하는 기준 등 이 모든 것들이 강 전무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터였다. 그런데 신경에 거슬리는 이런 장애물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었다.
“자네, 공과 사를 좀 구분해야겠어.”
“예?”
“링크빌리지 말이야. 왜 그렇게 거기에 공을 들이는 건가?”
“파트너십 차원에서 …….”
“총지배인 조카분 말인데, 아니 자네하고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안젤라 선생 말이야, 링크빌리지에 의료봉사 교육장을 건설하는 중이라던데. 자네의 제안서는 솔직히 그걸 돕겠다는 거 아닌가?”
기준은 순간적으로 다리 힘이 풀렸다.
직원들의 분위기가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간부 회의에서 강 전무가 노골적으로 기준과 안젤라의 사이를 의심한 그 즈음부터였다. 인사이트라오스에 지지를 보내던 직원들마저 기준을 사무적으로만 대하는가 싶더니 둘이서 대화를 나누다가도 기준이 나타나면 입을 닫기 일쑤였다.
“낯 뜨거울 정도로 비열하군.” 어느 날인가는 기준이 지나가는 말을 던졌더니, 변형섭이 정색을 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김 형, 강 전무는 그저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 아닐까.”

“…… 내가 링크빌리지에 있는 한, 그리고 총지배인의 조카인 이상 그 오해는 쉽게 풀리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강 전무라는 분, 링크빌리지에 관심 없는 거 알잖아요? 기준 씨 이러다가, 리조트 매각될 때까지 링크빌리지에만 있다가 그냥 …….” 안젤라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거라는 말이지?”
“기준 씨 제안이 수용되어 리조트가 변한다고 쳐요. 그렇다고 리조트가 매각이 되지 않을까요?”
안젤라는 지난 주 무숙자와의 대화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무숙자는 연수단 행사의 후임 인솔자에게 업무 지원 차 따라 왔었다. 그는 2박 3일의 짧은 여정 중에도 하룻밤을 링크빌리지에서 지냈었다.
‘형, 이번 움직임은 리조트 차원의 문제가 아니야. 그룹의 재정 상황이 워낙 좋질 않아요. 지난 몇 년간 금융전문가들이 그룹의 실세로 있으면서 문제가 심화된 거라고들 해. 정상적인 기업의 운영보다는 자본의 이익이 우선인 사람들에겐 …… 지금 리조트에 대한 관심은 오로지 최대한 가치를 키워서 매각 대금을 많이 받겠다는 것이야.’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무숙자로부터 직접 그런 말을 듣자 기준 역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다.
“라오스 현지 직원들은 리조트의 주인이 바뀌어도 그대로 남을 가능성이 커요. 기준 씨 제안대로 변화가 된다면 더욱 그렇겠지요. 무사오가 됐든 누가 됐든 그렇게 정성스럽고 유능한 현지 직원들을 버릴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기준 씨는 입장이 다르잖아요.”
“그럼 이제라도 강 전무한테 가서 죄다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할까? 카지노 투어니 골프 투어니 뭐든지 좋으니까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하겠다고, 그래서 리조트 가격 조금이라도 올리는 데 기여하고 그 대가로 회사에 계속 남아있게 해달라고?”
자기도 모르게 기준의 언성이 높아졌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지? 무엇 때문에 일이 이 모양으로 꼬여버린 것이지? 기준에게 짜증이 밀려왔다.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 어둠의 정체는 무엇인가.
안젤라는 그런 기준을 안타깝게 바라볼 뿐이었다.
기준은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하기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틀린 것도 없지. 애초에 안젤라 당신이 링크빌리지에 없었다면 그렇게 열정을 가지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 거야. 당신이 거기 있었기 때문에 함께 하고 싶었어. 어떻게든 힘이 되고 싶었고, 기회가 되면 언제든지 당신을 돕고 싶었어. 늘 당신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지.” 기준이 안젤라를 바라보았다. “뭐 크게 도움이 된 것은 없지만. 기업연수단을 유치하면서 링크빌리지를 파트너로 삼은 것도 사심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하지. 다 맞는 말이야.”
“…….”
“그러니 이제 그걸 그만 두라고?”
안젤라가 고개를 들어 정문 바깥쪽으로 이어진 거리를 한 동안 바라보았다. 비 개인 거리에는 가끔씩 조무래기들만 뛰어다닐 뿐 한산했다.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기준 씨는 아마 내가 거기에 없었어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루앙이 꿈꾸는 링크빌리지가 옳고, 왕위앙과 리조트 모두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까. 기준 씨는 그런 사람이니까.” 안젤라가 고개를 돌려 기준을 마주보았다. “하지만 기준 씨, 그러다가…….”
“회사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되냐고? 이미 쫓겨났잖아? 난데없이 링크빌리지 파견 근무라니…….”
바로 어제 오후 강 전무는 기준에게 링크빌리지 파트너십 담당이라는 임시 직함을 주었다. 당분간 링크빌리지에 머물며 사진 자료를 포함해 개발 진척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숙박시설, 자연 치유 센터, 상업용 시설 등 본사에 정식으로 제출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보고서를 작성하라는 지시였다.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기준도 아연실색했다. 처음에는 자초지종이야 어찌됐든 강 전무도 링크빌리지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면 일단은 반가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오전 짐을 꾸리고 차에 오를 때쯤에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말없이 턱 인사를 보내는 몇몇 직원들과 창가에 서 있는 강 전무의 표정을 보는 순간 기준의 뇌리에 한 단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격리!’
기준은 오전의 감정이 되살아나 목소리가 커졌다.
“기껏 여기까지 보내놓고, 조직의 가치를 최대한 높이라며 너를 신뢰한다, 너밖에 없다고 추켜세우더니 고작 리조트 팔아치울 생각이나 하는 회사라면 나 역시 돌아갈 생각 없어.”
“…….”
“리조트에서 안 되면 여기서 당신하고 일하면 되잖아! 내가 오래 전부터 꿈꾸던 생태마을 일구면서 여기서 살면 안 되나? 설마 루앙이 싫다고는 하지 않겠지? 하하하.”
기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잔뜩 격앙된 소리였다.
“기준 씨가 정말 원하는 게 그거예요?”
안젤라는 그렇게 반문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나 역시 당신과 같은 길을 달려가고 싶어요.
기준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만히 기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어느 새 눈가에 물기가 배어나왔다.

총지배인의 병실에 불이 켜졌다.
두 사람이 작은 병실로 들어서자 총지배인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김 차장, 인사이트라오스 제안서……, 나는 왜 안 주나?”
“여기 있어요.”
안젤라가 진료 가방에서 종이파일을 꺼내 총지배인에게 건넸다.
총지배인은 비교적 평온한 얼굴로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갔다. 사각사각 종이 넘기는 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 병실은 오후의 고요함으로 가득했다. 기준과 안젤라는 두 사람은 총지배인을 기다렸다.
한참 후, “잘 읽었네.” 그 한 마디 뿐이었다. 그리고는 긴 한 숨을 내쉬었다.
총지배인은 제안서를 정성스럽게 머리맡에 올려놓았다.
기준은 굳이 의견을 묻지 않았다. 총지배인의 마음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총지배인이 천천히 기준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번 우기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매각 협상이 진행될 게야. 그때까지 그룹의 자금 상황이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 리조트에 커다란 변화가 없다면 말일세.”
“그룹 차원의 자금 문제야 저희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앞으로 리조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재고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총지배인의 표정은 회의적이었다.
“가능성만으로 될까? 그나마 회장은 아직 미련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주위에서 채권자들이 강하게 나오면 어떤 선택을 할 지…….” 총지배인의 이마에 두 줄기 깊은 골이 만들어졌다. “회장 그 양반 그렇게 약아빠진 사람도 아닐세. 하기야 그 놈의 낙관적인 천성 때문에 현재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하여간 그룹이 이리 부실하게 되도록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총지배인의 한탄이 이어졌다. 알 듯 모를 듯 그룹의 사정은 기준이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해보였다. 그럴수록 기준의 마음도 점점 심난해져갔다.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자넨 이제 본사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나?”
기준 앞에 갑작스러운 질문이 날아들었다.
“예?”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어. 자네가 예전에 모시던 사장도 인정했고, 강 전무도 그 점은 인정할 게야. 제안서를 보면서 다시 느꼈네.”
“그런데 왜 본사로 돌아가라고 하시는지?”
“…… 기울어가는 배 위에 자넬 그대로 놔두고 싶지 않네. 남은 일들은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라도 내가 처리하겠네. 자넨 이제 본사에서 또 능력을 발휘해야지, 안 그런가?”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짧은 순간 만감이 교차 했다. 기울어가는 배, 총지배인은 리조트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욱 배를 떠날 수 없다. 게다가 그것이야말로 기준의 제안을 반대하는 자들이 바라는 바가 아닐까. 기준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총지배인님, 이번만큼은 명령을 따를 수 없습니다.”
“명령이 아니라 부탁일세.”
“제발 거둬주십시오. 예,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당장 이익을 창출해야 할 마당에 링크빌리지니 왕위앙의 미래니 하는 것들이 얼마나 비현실적으로 비춰질 지 잘 압니다.”
“허허, 그 이야기가 아닐세.” 총지배인이 혀를 찼다.
“지금 당장 어렵다고 해서 무사오 리조트가 하던 일들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미래는 영영 없을 겁니다. 언덕이 가파르다고 눈앞에 열린 사과에만 만족한다면 언덕 너머에 있는 무성한 사과나무를 영영 볼 수 없습니다. 현재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미래의 희망까지 내던지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여기에서 우리의 사과나무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언덕을 넘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건 단지 억울하고 미련이 남아서가 아닙니다.”
방 안에는 형광등의 잔잔한 파장이 흐르고 있었다. 파장의 힘 때문일까. 기준의 입술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라오스를, 라오스 사람들을 정말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입니다.”
그 순간 부드러운 기운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세 사람은 서로의 에너지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총지배인은 얼굴을 창 쪽으로 돌린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지내온 고뇌의 세월만큼 부쩍 늘어난 흰머리, 열대의 건설 현장을 누비며 얻은 훈장격인 검버섯들이 군데군데 퍼져 있는 옆모습, 그러나 강인한 의지를 잃지 않으려는 노익장의 얼굴이었다. 순간적으로 울컥해진 기준은 주저주저 망설이다 겨우 꾸벅 인사를 올리고 밖으로 나왔다.
안젤라가 말없이 뒤를 따랐다. 문밖으로 나서자 어느새 어스름이 다가와 있었다. 코끝을 간질이는 냄새가 향긋했다. 곧 다가올 건기를 미리 알리기라도 하듯 제법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기준은 차를 세워둔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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