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청나라 발상지 요녕 ‘신빈현’은 조선의병 거점지

청태조 누루하치의 4대조가 모셔진 영릉

신빈만족자치현 왕청문 조선족촌

요녕성 동부 산간지역에 있는 신빈현의 옛 이름은 흥경(興京)이다. 이곳은?청나라의 발상지다. 청태조 누루하치의 4대조를 모신 영릉과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한(汗)으로 등극한 허투아라성 등 역사적인 유적들이 있다. 지금도 만주족 자치현이다. 인구는 31만 명 안팎인데 조선족은 3452호에 1만3000여명으로 총인구의 4.3%를 차지한다.

이곳은 소자하(?子河), 태자하(太子河), 부이강(富?江) 등 크고 작은 물줄기가 1750여개 정도로 수자원이 풍부하다. 그래서 1870년대부터 자연재해에 시달리던 조선북부의 한인들이 압록강을 건너와 개척하여 논을 만들고 정착을 시도하였다. 이주 경로는 압록강을 건너 집안과 통화 관전과 환인 등을 거쳤다.

폐교된 화흥중학교 교실은 왕청문 조선족 노인협회의 활동실로 변했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의 비석

1910년 강제병합으로 조국을 떠나오는 사람들에게 신빈은 은신처를 겸한 생활의 근거지로 이름이 났다. 많은 의병과 그 가족들의 망명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혁명당, 국민부, 조선혁명군의 거점이 되었는데 그 흔적으로 1990년 초까지 당시 정의부, 국민부의 청사건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19년 3월 21일 왕청문교회에서는 3·1독립운동으로 400여 명이 집결한 가운데 태극기를 앞세운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현재 폐교된 왕청문(旺淸門) 조선족소학교는 독립군 남만주사령부의 자리였으며 조선혁명군이 세운 화흥중학교와 한 울타리에 있었다. 지금은 노인협회의 활동실로 쓰고 있으며 운동장 끝에는 양세봉(梁世奉)장군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1994년 김몽순 김순화 등이 저술한 신빈조선족지에 의하면 이곳 신빈현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한 한인으로 양세봉, 이홍광, 이명해, 한호, 한진, 이민환, 신팔균, 김동산, 현화죽 등이 기록되어 있다.

노인협회 활동실 앞에서 민속무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왕청문 조선족 노인협회 회원들.
연습을 하다가 사진촬영에 미소를 짓는 여인.

양세봉은 평북 철산출신으로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무장 항일단체인 천마산대를 조직하고, 대유동 습격 등에서 항일투쟁의 선봉 역할을 했다. 광복군총영, 대한통의부, 정의부, 국민부 등을 거쳐 1932년 3월과 5월에 조선혁명군을 이끌고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만주국군이 점거하고 있던 신빈현 영릉가 시가를 공격한 영릉가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총사령부를 환인, 흥경, 집안, 통화 등의 경계지점에 두고 산하에 5개 사령부를 거느리는 대부대로 개편하고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통화현 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 속성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그 교장을 맡아 항일전선에서 투쟁할 사관을 양성하고 5만의 병력을 훈련시켰다.

1934년 3월 이후 관전현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은 계속되었으며 홍경현을 습격하기 위해 400여 명의 부하를 동원했고, 중국의용군 등철매와 합류하여 북만에서 모병 활동을 벌였다.

양세봉이 ‘군신(軍神)’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명성과 눈부신 활약을 보이자 일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밀정 박창해에 의해 양세봉과 평소 친분 있는 중국인 왕모라는 자가 매수되어 중국인 사령관이 군사문제 협의를 요청한다는 거짓 전언으로 유인하였다. 1934년 8월 12일 양세봉은 신빈현 왕청문 사령부를 떠나 향수하자향 황구촌으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매복한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현장에서 장렬히 순국하였다.

필사본 족보를 가보로 간직하고 있는 김정동 옹과 가족.
정월 대보름의 오곡밥의 나물 반찬 뒤로 콩나물시루가 보이는 부엌

그의 업적을 기려 남만주 사령부가 있던 신빈현 왕청문 화흥중학교의 옛터인 왕청문 조선족 학교 운동장에 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소수민족과 관련된 기념비 등의 건립을 허가하지 않는 중국의 실정에서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기념비 건립은 신빈현의 현위 서기로서 정년퇴임한 최선주를 중심으로 몇몇 퇴직한 조선족간부들이 1994년 결성한 경제문화교류협회가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시행한 첫 번째 사업이었다.

조선족들이 성가를 높이며 활약하던 전성기에는 신빈현에 31개에 달하는 조선족 소학교와 3개의 중학교, 1개의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소학교와 완전중학교가 1개교씩 남아있다.

그리고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노인협회이다. 노인협회 회원의 자격은 남자 60세 여자 55세인데 왕청문에서는 남녀 공히 55세 이상으로 자격조건을 완화하였으며 조사 당시인 2007년 32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었다.

대문 앞 외양간 앞에선 김 옹.
움에서 김치를 꺼내는 김 옹의 며느리

왕청문 구성원들의 출신지를 살펴보면 16호가 영남지방, 나머지는 평북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었다.

조사를 하던 2007년 마을에서 가장 연로한 분은 경남 밀양군 산내가 고향인 김정동(金汀東, 1924년)옹이다. 김 옹은 부친 김상준(57년 작고)이 고향인 밀양에서 1911년 관전으로 들어와 환인 업주구(業主?)에서 화전을 일구던 시기에 출생하였고 쌍립자(?砬子), 쾌대모자(快大冒子)를 거쳐 1952년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가족으로는 아들 김일출(1949년생), 며느리 김금선(1951년생), 손자 김성준(1972년생)과 소학교 2학년인 증손자가 있었으며 손녀 둘은 심양으로, 손부는 사업차 사이판 등지로 나가 있다.

4대가 한집에 살고 있는 김옹의 집은 그때까지도 20년이 넘은 소구유가 있었으며 한국의 농촌 주택 구조처럼 대문 오른쪽에 외양간이 붙어있었다. 집안에서 콩나물을 키워서 먹으며 사각의 다과상 등 한민족의 전통적인 민속품들이 남아있었다.

대보름에는 오곡밥과 나물반찬을 해먹고, 김치는 움 속에 저장하며, 메주를 쑤어 된장과 간장을 직접 담아 먹는 등 떠나온 고향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키고 있다. 한편 김 옹은 이번 촬영 등을 계기로 김 옹의 고향인 경남 밀양군 산내면 가인리 초주촌을 방문해 일가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고향을 방문하고 족보를 구입한 노부부.
우리를 배웅하는 김 옹과 그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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