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말 한마디의 ‘무거움’과 ‘무서움’

아들이 미국에서 태어났는데 이름의 영문표기를 고치고자 법원에 간 적이 있다.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짐작을 하고 갔는데, 판사가 성조기 앞에서 구두로 확인하는 간단한 절차를 거치더니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결혼식에서 혼인서약을 하는 것처럼, “I do” 또는 “Yes” 라는 한마디였다.

영미권에서 성인들 사이에 가장 무서운 말은 “You have my word”라는 한마디이다. 무슨 다짐을 몇 번 어떻게 하는 것보다도 이 한마디는 남자들 사이, 신사들 사이에 마치 우리들의 ‘남아일언중천금’ 이라는 구절만큼이나 엄숙하고 무거운 약속이다. 영미권에서 살아본 사람이라면, 또는 이들이 만든 영화를 유심히 보게 되면, 이 말이 얼마나 전율할 만한 무게로 다가오는지를 절감할 것이다.

미국 영국의 장단점, 강약점에 대해서는 각자의 경험과 철학에 따라 상이하겠지만, 이 명제에 대해서는 다같이 수긍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지난 수세기동안 앵글로 색슨이 세계를 제패해왔고 앞으로의 21세기도 아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까닭이다.

중국이 금세기 내에 욱일승천하는 부강은 이룰 지 모르나, 선진일류국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는 예단도 이런 근거에서이다. 선진일류국가를 지향해 나가면서 반드시, 그리고 먼저 고쳐나가지 않으면 안될 것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거짓말을 태연히 하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 있는 어리석음이다.

이것이 분명히 되지 않는 한 우리가 바라는 선진일류국가는 절대로 달성할 수 없다. 흔히들 정치인들의 이중성, 거짓말을 “정치라는 것은 으레 그런 것이려니”하고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선진화를 이룩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처칠이나 루즈벨트도 언어의 경제, 기교를 부리는 일은 있었다. 정치에서 ‘병자(兵者)는 궤도야(詭道也)’라는 손자병법의 첫마디가 적용되고 용인될 수도 있는 차원과 범위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끌어대지 않아야 될 곳에 교묘하게 숨는 것을 “과연 정치9단이다”라고 넘어가는 증상은 이제 단연코 끊어내야 한다.

정치 뿐이 아니고 국가 사회의 모든 부면에 있어서 선진일류사회의 ‘알파요, 오메가’는 “말이 무겁고 무서운 사회”이다. 이것이 바로 ‘삶의 질’이 높은 문명사회이고, 강한 국가의 기본이며 통일조국이 이룩되는 바탕임을 믿는다. 새해에 새삼스레 ‘으뜸’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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