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현의 중국이야기] 루쉰은 왜 ‘메스’를 버리고 ‘붓’을 들었나

‘메스’를 집어 던지고 마비된 국민정신 개조에 나섰던 문호(文豪) 루쉰. <사진=루쉰 전집>

루쉰(1881~1936) 사후 76년이 지났지만 중국에서 루쉰에 대한 추모와 연구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대형 서점이든 동네 작은 책방이든 그의 전기나 작품들은 쉽게 눈에 띤다. 중국인들은 그를 막심 고리끼나 셰익스피어의 반열에 올려놓기를 서슴지 않는다. 수년 전 상하이 루쉰공원 내 루쉰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기념관 내에 비치된 동서고금의 루쉰 관련 저작이 무려 1000여 종에 이름을 보고 그에 대한 열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홍루몽이 ‘홍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가 계속되는 것처럼, 루쉰도 ‘루쉰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강인한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늘 생계를 위해 동분서주했던 단구의 병약한 인물에게서 어떻게 이토록 엄청난 에너지가 분출될 수 있었을까.

루쉰의 비타협·불굴의 저항정신은 이미 유년시절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는 풍족한 유년 생활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해 그의 조부가 저장성 과거시험 주관자에게 뇌물을 제공한 탓으로 수감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친마저 병들어 죽게 되었다.

한 때 양반집 자제로서 ‘도련님’ 대접을 받다가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옛 머슴들은 물론 ‘동네 똥개’마저도 무시하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였다. 이처럼 짧은 순간에 인생의 영욕을 맛보자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일생 동안 그를 지배하였다.

루쉰은 애초에 의학도였다. 그는 왜 ‘메스’를 버리고 ‘붓’을 택했는가? 의사가 되어 자신처럼 병약한 환자를 돌보려던 초심을 바꾸어 문학에 투신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른 바 유명한 ‘환등기 사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1922년 12월에 쓴 단편 소설 모음집, <나한>의 서문에 보이는 그의 변을 들어보자.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6년 1월, 2학년 2학기에 새로 배우게 된 세균학 수업 시간이 끝나고 남은 시간에 러일전쟁 홍보물 슬라이드를 보았다. 화면 속에 중국인이 등장하였다. 이 중국인은 러시아 군대의 스파이로 있다가 일본 군대에 체포돼 총살당할 처지에 놓였다. 그런데 이러한 광경을 빙 둘러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역시 중국인들이었다.

일본인 학생들은 이 장면을 보고 박수치며 환호하였다. 자기 동포가 총살당하는 장면을 강 건너 불 구경하 듯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화면 속의 중국 동포들에게 실망과 깊은 회의를 느꼈다. 이리하여 의사가 되려던 꿈을 버렸고, 문학이 마비된 국민정신을 개조시키는 데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루쉰전집』, 제 1권)

혈기 방장한 25살 때의 일이다. 루쉰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를 자퇴하고 도쿄로 돌아와서 이때부터 줄곧 문학을 통한 투쟁에 전념한다. 루쉰은 사서오경과 ‘공맹의도(孔孟之道)’로 상징되는 봉건 노예화 교육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아울러 봉건전제주의와 결별을 의미하는 사상혁명을 촉구하였다.

이 무렵 루쉰은 많은 글을 통해 국민당 정부의 노예화 교육을 비판하였다. 일례로 ‘재난에 맞서는 것과 피하는 것을 논함(赴難和逃難)’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자, 호랑이와 같은 맹수를 길러내는 식의 교육은 맹수들에게 발톱과 어금니를 사용하게 할 수 있다. 소나 양을 길러내는 식의 교육은 위급할 때 뿔을 사용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교육은 작은 뿔마저도 사용할 수 없는 토끼를 길러내는 것과 같은 교육이어서 큰 위험이 닥쳤을 때는 오직 토끼처럼 팔딱팔딱 뛰기만 할뿐이다.”(노신전집, 제 4권)

봉건 노예화 교육의 핵심은 ‘공맹의 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봉과 삼강오륜을 강조한 것으로서, 이에 반대하는 것은 불충, 불효, 부도덕한 것으로 여겼다. 수 천 년 내려온 봉건도덕의 폐해를 목도하고, 루쉰은 ‘공맹의 도’는 ‘사람을 잡아먹는 도(吃人之道)’라고 일침을 가하였다.

루쉰은 적지 않은 소설 가운데서 구 교육제도 아래 길들여진 무능한 독서인을 풍자하였다. 소설 백광(白光)에 나오는 진사성( 陳士成)이나 공을기(孔乙己)는 가장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공을기는 오래 동안 책을 읽었지만 과거에 낙방하여 관리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신이 글 깨나 읽는 서생임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노동 인민’을 무시하며, 서생의 상징인 낡은 장삼을 걸쳐 입고 노동 인민의 행렬에는 결코 가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노동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생계를 위해 절도 행각을 벌였으며 결국 가난과 병으로 죽고 말았다. 구 교육제도가 길러냈던 독서인은 공맹사상이 남긴 유독에 절어 있었기에, 공을기는 바로 이러한 봉건교육제도의 희생양이라 할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법고시, 외무고시, 행정고시, 기술고시 등 각종 고시에 아까운 청춘을 바쳐가며 입신출세를 꿈꾸다 좌절한 ‘공을기의 후예’들이?주위에 흔하디흔하다. 상아탑에는 오직 ‘생계형 아르바이트 노예’, ‘취직을 위한 묻지마식 스펙 쌓기 노예’, ‘고시 노예’들로 가득하다. 노예란 표현이 지나친 것일까. 미래를 내다보고 자아를 실현하려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탐구정신은 실종된 지 오래다.

중국인들의 눈에 비친 한국은 성형 왕국이다. 한국 화장품을 사고, 성형 수술하며 제주도 구경하는 것이 중국 아녀자들의 꿈이다. ‘메스’를 들고 중국 아녀자들의 얼굴을 다듬는 한국 성형외과 의사들의 모습과 메스를 버리고 붓을 든 루쉰의 모습이 교차되면서 묘한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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