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45회 “숲과 강”


“누구?”
“리엔이에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0시였다. 이런, 늦잠을 잤군. 낭패감에 빠진 기준은 부랴부랴 얼굴에 물만 바른 채 서둘러 옷을 걸치고 숙소를 나섰다. 리엔의 뒤를 따라가는데 어젯밤 변 차장과 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자리에 들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늦잠을 자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나 오늘 휴무 아니었던가?”
리엔이 말없이 돌아보더니 살포시 손을 모아 합장을 했다.
“그런데 왜 나를 기다리고 있지요?”
“변 차장님이 모시고 오라고 했어요.”
리엔이 기준을 데리고 가는 방향은 사무동이 아니었다. 그녀는 호텔 건물도 그대로 지나쳐 호숫가를 지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뒤뜰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며칠 전 번개를 맞아 쓰러진 거목이 눈에 들어왔다. 수백 년은 자랐을 나무가 한 순간에 맥없이 꺾어진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재빠른 스콜은 오늘 아침에도 그 새 다녀갔는지 무성한 수풀을 끼고 이어지는 길가에는 물기를 머금은 열대 화초들이 보란 듯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물론 강 건너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낮은 구름이 연출하는 풍경은 언제 보아도 환상적이었다. 리엔이 걸음을 늦추며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마치 ‘라오스의 자연을 사랑하시죠?’라고 묻는 것 같았다.
“라오스 속담에 ‘자연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숲이 매우 울창하기 때문이고, 바다가 광활하고 깊을 수 있는 것은 하천의 물을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어요.”
리엔이 자연스럽게 기준의 옆으로 다가왔다. 햇살을 받은 그녀의 얼굴이 청초한 들꽃을 닮은 듯 빛이 났다.
“그래요? 이곳과 참으로 어울리는 속담이군요. 울창한 숲과 생동하는 강물이야말로 라오스의 보물이지요.” 기준이 우거진 숲을 둘러보며 대답했다.
“그런데 만약에 강물이나 나무가 없었다면 어떨까요?”
“음, 무슨 말인지?”
“바다와 자연은 광활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저는 가끔씩 강물이 어떻게 바다가 되는지, 나무가 어떻게 아름다운 자연이 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리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분위기 때문일까, 기준은 문득 리엔이 무숙자와 짝이 되면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조금 엉뚱한 소리를 했나요?”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기준을 바라보며 리엔이 물었다.
“아, 아니. 변차장이 이리 모이라고 한 거예요?” 기준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사실은 저희들이 먼저 모이자고 했어요.”
몇 걸음 앞서가던 리엔이 손을 들어 앞쪽을 가리켰다.
누군가는 ‘그리움의 동산’ 혹 다른 이들은 ‘Miss Laos’라는 부르는 쉼터 부근에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Laos, I miss you’라고 새겨진 바위를 중심으로 십 여 명의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기준이 다가가자 라오스 현지 출신을 포함하여 팀장급의 낯익은 얼굴들이 기준에게 목례를 보냈다. 기다리는 동안 이야기가 조금 진행된 상태였는지 웅성거림 속에서도 대부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앞에 나선 사람은 역시 변형섭이었다. 그는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지만 그런대로 차분하게 설명을 해나갔다.
리조트 매각과 관련된 움직임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본사에서 그룹 경영 차원에서 검토한 사안이며, 직접적으로 리조트 경영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한 일은 아니다. 즉, 직원들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사오 리조트도 협상 대상의 하나로 거론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떤 사항도 결정된 것은 없으며, 현재로서는 진행되는 사항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리조트의 경영 상황을 걱정하는 것도 좋지만, 만약에 변화가 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리조트를 움직이는 주체는 여러분 직원들이라는 사실에는 달라질 게 없다.
구구하게 장광설을 펼치기 보다는 요점 중심으로 논리적인 설명을 하는 형섭의 스타일이 신뢰감을 주었는지 어수선했던 분위기는 차차 가라앉았다.
“여러분, 소문이 많은 조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소문이란 소통이 막혔을 때 발생하는 악성 바이러스와도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불안하고 답답해하는 것 역시 무성한 소문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드린 것은 소문이 소문을 부르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형섭의 입에서 직원들이 모르는 새로운 정보나 사실이 나온 것은 없었다. 이미 직원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떠돌던 소문의 일부였을 뿐이다. 하지만 형섭의 설명은 소문의 줄기와 가지를 쳐줌으로써 더 이상의 번창을 막는 데는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사내에 어느 누군가가 더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그 정보를 차단함으로써 소통이 막히며 결국 서로가 불신하게 되면서 악순환이 시작되는 것 아닌가요?”
얼마 전 루앙프라방의 리조트로 옮겨간 캄차이의 후임 팀장이 물었다.
잠시 후, 서울 본사에서 파견 온 팀장이 말을 받았다. “원래 지위가 높은 사람이 더 많은 정보를 갖는 거는 당연하지요. 물론 일부러 정보를 차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모든 정보를 공유할 수는 없지 않나요.”
이번에는 또 다른 현지 출신 팀장이 말을 받았다.
“자기가 맡은 분야에서의 전문적인 정보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회사가 추구하는 목적이나 우리 개개인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변화에 대한 정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문이 터지자 토론은 자유롭게 이어졌다.
“소문이든 유용한 정보든 앞으로 더 이상은 밀실에서 몇몇이 숙덕이는 상황은 없어야 할 겁니다.”
“우리 리조트를 둘러싼 어떤 이야기도 우리 모두에게 공개되어야 할 겁니다.”
“결국 우리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먼저 실천해야 할 일 아닙니까?”
꽤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결국 직원들의 요구는 정보의 원활한 소통이었다. 그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짐작했던 것보다 컸다. 기준은 개입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어느 순간 기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사람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원 한 쪽 우거진 숲 속에서 흐르는 물소리만 졸졸거렸다. 형섭이 기준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넓고 깊고 것은 모든 강의 물을 받아들이기 때문이고,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수많은 나무와 수풀이 그 안에서 울창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리조트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지 않은 모두의 공간이고 이곳에서 일하는 우리는 모두 한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낯익은, 맑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사람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침묵을 깼다. 라오스식의 억양이며 목소리의 톤이 시냇물 소리와 참으로 잘 어울렸다. 고개를 주억거리던 기준이 앞으로 나섰다.
“맞습니다. 여기 우리가 일하는 리조트는 모두의 공간입니다. 서울 본사의 높으신 분들뿐만 아니라 여러분과 현장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멋진 숲과 강을 허락해준 라오스의 주민들 모두가 리조트의 주인입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기준을 바라보았다.
“리조트에 대한 본사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저도 들었습니다. 물론 공식적으로 발표된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인 명령이든 비공식적인 지시든 우리는 회사의 결정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걱정을 하는 것이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기준은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공기를 가슴 속 깊이 들이마셨다. “정책을 결정하는 건 회사의 결정권자들이지만 리조트의 생명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리조트의 생명이라니 무슨 뜻인가요?”
“여러분 여기 우리를 둘러싼 오래 된 거목들, 유구하게 흐르는 저 강물은 누구의 것인가요? 리조트의 소유인가요? 이 땅의 소유권이 리조트에 있으니 아마도 그럴지 모릅니다. 하지만 리조트의 주인이 곧 나무와 강물의 주인은 아닙니다. 나무와 강물의 생명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소유권은 사람들이 만든 제도일뿐이지요.”
“나무를 패어 버리고 강을 막고 할 수는 있지 않나요? 그건 나무와 강물의 생명을 좌우한다는 것 아닌가요?”
“그렇지요. 하지만 그건 일시적으로 잠시 그렇게 보일뿐입니다. 나무를 베어내도 그루터기는 남고 뿌리는 살아있습니다. 강을 막아도 물은 흐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모든 나무를 베고 모든 강물을 막아버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숲은 다시 자라고 강물은 제 길을 만들어 바다로 흘러갑니다.”열변을 토하던 기준은 얼핏 리엔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지는 것 같았다.
“여러분은 리조트를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지금 우리가 모여 있는 이곳이 어떤 리조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지키고자 하는 리조트는 어떤 리조트입니까?”
사람들은 기준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입속말로 웅얼거리릴뿐 바로 답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재잘대는 물소리, 풀벌레 소리만이 오전의 정적을 깨고 있었다.
“유명한 리조트? 장사 잘되는 리조트? 최고의 리조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또는 에코리조트, 사랑받는 리조트, 그리워하는 리조트? 모두 좋습니다. 그건 누가 정해주는 것은 아닐 겁니다. 여러분 스스로 마음속에서 바라고 지키고 싶은 리조트의 모습이 있겠지요. 저는 그것이 바로 리조트의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경영권을 가지고 있든 누구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든,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갈구하는 바로 그것이 진짜 리조트의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리조트의 생명에 대해서 함께 믿음을 나누고 함께 실현하기로 결심한다면 우리는 리조트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 변화는 자신들이 오늘 여기에 모여 있는 그 이유를 찾았다는 안도감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리조트의 생명을 지킬 전문적인 지식도 굳센 의지도 열정적인 마음도 부족합니다. …… 저만 그런가요?”
누군가 자기고백을 했다. 그러자 곧이어 여기저기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매각 논의가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불안하다. 매각 논의를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없겠느냐, 만약에 매각이 진행 된다면 앞으로 우린 어떤 대비를 해야 하느냐, 총지배인님이 복귀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몇몇 직원들 사이에서는 며칠 후 시작되는 2차 연수단 행사를 위해서는 무엇을 더 준비해야 하느냐는 이야기도 나왔다.
기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도 본사에서 전체적인 경영전략을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어려운 경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논리가 가장 우선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경제의 논리, 경제적인 계산으로 생존의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오히려 놓치는 부분이 생깁니다. 지금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결정권자들로 하여금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분들에게 다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말씀엔 동의하지만……, 어떻게요?”
서울 본사에서 파견 나온 팀장 중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말은 없었지만 다른 직원들의 눈빛 역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저도 …… 잘 모릅니다.”
기준의 대답에 다들 의아해했다. 몇몇은 고개를 흔들며 실소를 터뜨렸고, 일부는 뒷자리에 서있는 변형섭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인 게 아닐까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지를 분명하게 확인한 것만으로도 오늘의 대화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표를 아는 것과 실제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요. 황톳물이 넘치도록 흘러가는 쏭강의 이쪽과 저쪽 사이보다 더욱 큰 차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더욱 우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모든 걸 헤쳐 나가야 합니다.” 형섭이 기준을 바라보며 말을 넘겼다.
“황당하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솔직히 저는 정답은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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