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구의 필리핀 바로알기] 스페인->미국->일본지배 거치며 공산당 결성

지난 칼럼에서 필리핀 지배층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믿어지는 서구 지식인, 경제인 및 사건들에 대해 살펴보며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예로 든 바 있다. 그의 ‘보이지 않는 손’ 이론은 각 분야에 걸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1783년 Zong호 사건 판결이 그 가운데 하나다. Zong호의 선장은 항해 중 물이 부족해지자 132명의 흑인노예를 바다에 던져 익사시켰다. 피해 사업가는 선주에 대해 보험약관상 ‘해상보험’에 속하기 때문에 보험회사가 보전해줘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법원은 “흑인노예를 바다에 던진 것은 말을 바다에 던진 것과 마찬가지 경우에 해당하므로 보험회사는 사업자에게 흑인 1명당 말 한필에 해당하는 30파운드를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필리핀 현대사에 영향 준 사건들

1789년부터 10년간 계속된 프랑스혁명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시민들에 의한 공화제를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혁명은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의 활약에 힘입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1791년엔 미국에서 민간 중앙은행이 설립되었는데 민간이 80%, 정부가 20% 소유토록 했다. 주요 민간 주주는 잉글랜드은행과 로스차일드 가문(유태계)이었다. 1815년 로스차일드 가문이 잉글랜드은행의 실권을 장악했다.

나폴레옹은 1815년 은행가(자본가)의 영향력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한 나라의 정부가 은행가의 돈에 의존하면, 정국도 정부 지도자가 아닌 은행가가 장악하기 마련이다. 돈 주머니를 쥔 쪽이 돈을 쓰는 쪽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돈에는 조국이 없다. 금융재벌은 무엇이 애국이고 소상함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이 얼마나 선견지명 있는 명언인가?

1848년엔 영국에서 예금주들과 은행 간 고소사건(Foley vs Hills and others)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내용은 이렇다.

“예금주가 은행에 화폐를 저축하면 그 돈은 예금주가 아닌 은행가에 속하게 된다. 은행가는 예금주가 요구하면 언제든지 상응하는 금액을 돌려줄 의무가 있다. 은행에 저축해 일단 관리를 맡긴 돈은 소유의 의미와 본질상 은행가의 돈으로 봐야 한다. 은행은 이 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예금주의 돈을 위험한 처지에 빠뜨렸든 해로운 투기를 했든 이에 답변할 의무가 없으며, 다른 사람의 재산처럼 보존하고 처리할 의무가 없다. 그러나 계약의 구속을 받기 때문에 예금주가 저축한 금액에 대해서만큼은 의무를 가진다.”

영국의 생물학자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1859년, 진화론을 발표하여 생명의 진화 이론을 제시하고 자연선택설을 주장하였다. 5년 뒤 미국의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대통령이 노예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발표하였다. 당시 미국에는 200만명 정도의 흑인 노예가 있었다.


스페인 식민 끝나자?美·
日이 번갈아 지배

스페인 식민통치를 종식시키고자 필리핀의 노동자와 소작농을 중심으로 무장투쟁 혁명이 370여년간 계속됐다. 마침내 필리핀은 1898년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혁명은 노동자, 서민층 출신 독립영웅인 보니파시오(Andres Bonifascio, 1863~1897)가 1892년 조직한 Katipunan이 주도하였다. 조직의 대다수는 농업 노동자와 토지가 없는 소작농들이었다.

그러나 스페인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어내기 전에,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이 파리조약(1898년 12월)으로 2000만달러에 필리핀을 양도받아 그 후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되었다.

파리조약이 체결되자 혁명군은 미국과 3년 동안 전쟁을 치렀지만, 미국의 대규모 군대 파견과 혁명세력 내 지배층(엘리트 민족주의자)들의 배신으로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엘리트 민족주의자들이 미국과 결탁한 것은 기득권 확보와 농민들이 요구하는 토지개혁에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필리핀 점령 후 스페인 식민시대의 기득권층들을 척결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식민지 지배의 협력 파트너로 활용하였다. 이는 해방 후 미국의 남한 점령군들이 모든 행정에서 남한에 남아있던 일본인들과 친일파들에게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던 것과 비슷했다.

해방 직후 미군 선발대를 맞이한 조선총독부 재무국장 미즈타가, 미군이 조선인에 대해 경멸의 빛을 보일 때엔 같은 지배자로서 동질감을 느꼈다고 했듯이, 미국 지배자들은 필리핀 서민들을 ‘하등인간’으로 대우하며 경멸했을 것이 분명하다. 당시의 스페인 식민지배층들 역시 동질감을 느낄 정도의 식민정책을 폈을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905년 미국과 일본은,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지통치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침략에 적극 협력하고 식민통치를 인정한다는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체결했다. 1907년 최초의 선거를 실시하여 각 지방의 지배층들로 이뤄진 81명의 하원의원과 상원의원(필리핀 지배층 5명과 미국 식민정부 대표 4명)을 선출하였다.

1930년대에 교사였던 Benigno Ramos에 의해 합법적으로 조직된 농민운동은 Luzon의 중·남부지역으로 확대되다가 이후 토지개혁과 독립을 요구하였다. 1935년에는 6만5000명의 무장농민이 이 반란에 참여하였다.


1935년 친미 Quezon 대통령 선출···?지배층 이익만 대변

지주 및 지배세력들은 미국의 후견 하에서 이익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의 개혁요구는 물론 독립에도 반대하였으나, 농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미국은 필리핀 독립법을 통과시켜 자치제를 도입하고 1935년 대통령 Quezon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Quezon 대통령은 미국에 협조적인 지배층들만으로 자치정부를 구성했으며, 대지주와 지배층들에게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토지확대를 용인하거나 지원하고, 세금을 제때 내지 못한 농민들의 토지는 가차 없이 몰수하였다. 그러자 농민운동은 더욱 조직화되어 필리핀 공산당과 사회당을 결성하여 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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