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자연 속으로] 길 없는 들판에 서니 모든 게 길이 되고

한 겨울 팔당대교 아래 한강 위 철새 고니와 텃새 물새의 어울림


겨울바다를 말하지만 겨울강이 더 좋다

홍천강이 끝나는 곳에서 바라보면, ‘홍천’은 강 건너 저편의 산마을과 오목조목 분지로 둘러싸인 땅이다. 편하고 빨리 갈 수 있는 국도를 버리고, 한강과 홍천강이 합류하는 ‘마곡’이라는 강마을에서부터 강변의 모래와 자갈밭 그리고 얼어붙은 강 위를 종일 걷기로 했다.

두 군데의 물줄기가 한군데로 합치면 산은 꼴까닥 죽어 없어진다. ‘마곡’은 물이 산을 먹어치운 한촌이다.

길은 걸어야 안다. 허위허위 길에 맡겨 그림자 뒤로 하고 간다, 겨울바람에 삭아버린 강역(江域)은 춥고 적막했다. ‘마곡’은 홍천강의 끄트머리에서 강물이 찰랑찰랑 조용히 놀며 천파만파의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아! 반갑다! 얼어붙은 강 위로 약하게 눈발이 날린다. 겨울바다를 말하지만, 오늘은 겨울강을 쏘다닌다. 강가 자갈밭 여울에 들어서자 물오리 몇 마리가 날개를 가볍게 치며 푸드덕 날아오른다. 강바람은 더 세차게 몰아쳤다.

강바닥을 헤매 울던 바람은 빈 하늘로 흩어져 잎이 다 떨어져 헐벗은 미루나무 가지를 흔들고 운다. 아무렇게나 나자빠진 허연 들풀과 강가의 비릿한 내음이 야생의 정취를 더한다.

‘홍천’의 여로는 이렇게 시작됐다.

‘노르딕’ 발을 빌려 머리로 걷는 사유의 ‘하이킹’

강변을 ‘아틀리에’로 삼아 풍경을 마음에 담아본다. 풍경이 붓이고 붓이 나에게 흔적을 준다.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풍경이 스밀 것이다. 상상 속에 먹그림 긋고 지우는 대로 풍경은 달라졌다.

경관을 꼬고 놓아주며 유유히 걷는다. 작품은 자연이 되었다. 전위(前衛)예술은 전위(轉位)인가? 발 옮기는 대로 풍경은 따라왔다.

길과 여행은 지금 걷고 있는 강바닥의 발자취다. 이 한 발작 한 발작을 버리는 것이 걷기다. 그게 여행이다. 여행은 잊는 것이다. 모든 것을 지우는 것이다. 첩첩사연 미련을 뭉뚱그려 버린다. ‘빼앗긴 세월’도 아니고 ‘준 세월’도 아닌 한천(寒川)에서 강은 나를, 나는 강을 서로 ‘쇼핑’하며 버린다.

휘돌아 마을에 닿았다. 인기척 없는 하릴없는 마을은 숨결마저 끊겨 있었다. 그 동한(凍寒)의 한촌(閑村) 마을은 작은 가난으로 잠들어 있다.

그날은 실로 춥고 혹독한 겨울이었다. 그럴수록 천연(天然)한 물길이 더 좋았다. 어디한번 혼줄 나 보라는 듯. 문제는 손이었다. 두터운 장갑을 끼고 양손에 스틱을 잡고 ‘노르딕’ 워킹으로 재촉 했지만 손끝이 아려서 견딜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77년 전 내 나이 10살 때, 큰댁으로 설 쇠러 20여리 길을 갈 때도 꼭 이랬다. 그때 손을 바지춤에 넣고 배꼽을 문지르며, 빨리 큰댁에 가서 따뜻한 아랫목의 화로를 끼고 시원한 식혜를 마셔가며 찰떡에 조청을 꾹 찍어 한입 먹는 조바심에 바삐 총총걸음 쳤다.

그런 짓하던 꼬마는 이렇게 늙어버렸다. 해를 넘길수록 전보다 한참 느려진 걸음이 강자갈의 탄력을 제대로 느끼게 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방안에 있을 때의 세계는 오리무중이지만 열살배기로 돌아온 ‘노르딕’은 마냥 신나는 하루다.

오르막과 내리막은 하나의 같은 언덕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긴 느림의 마라톤이 솔로(Solo)의 ‘노르딕 워커(Nordic walker)’이다. 정상을 정복하겠다는 일념의 등산과는 달리 ‘노르딕’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발을 빌려 머리로 걷는 사유(思惟)의 ‘하이킹’이다.

헝클린 강 길은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모이고 모아질 듯 멀어지는 오만 가지 잡풀과 자갈이 누워 자는 벌판이다. 길 없는 들판에 서니 모든 게 길이 되고 멀리 아득하다. 몸으로 밀어붙인 생(生)이 강에 허랑(虛浪)인다.?아스라한 들판이 일도 없이 허전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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