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5일] 2000년 체르노빌원전 역사속으로

2010년 반기문 총장의 팬티 공개된 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2010년 12월15일(현지시각) 열린 유엔출입기자단 연례만찬회에서 참석자들을 시쳇말로 ‘빵빵 터뜨렸다’. “사각팬티를 입는다. 달라붙지 않아 좋다”면서 자신의 신발 사이즈와 약지 길이, 신용카드 번호까지 공개했다. 이런 퍼포먼스는 당시 위키 리크스가 공개한 외교전문의 파장을 의식한 것이었다.
외교전문에 따르면, 유엔 주재 미국 외교관들이 ‘유엔 지도자들의 신용카드 번호와 이메일 주소, 전화 및 팩스 번호 등을 수집하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날 만찬에는 위키리크스 때문에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던 수전 라이스 유엔 주재 미국 대사도 참석, “미국 뉴욕에 널리 퍼진 빈대들을 퇴치할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웠다.
반총장은 이날 “나는 외계인을 만날 지구 대표를 선정하기로 결심했다”면서 ‘터미네이터’, ‘프레데터’ 등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대기권 밖(outer space) 전권 대사’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선정이유로는 ▲외계인과의 협상법을 알고 있는 인물 ▲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인물 ▲추진력이 굉장한 사람 등이었다.

2008년 화교출신 아피싯 웨차치와 태국 총리 취임

2008년 12월15일 아피싯 웨차치와(태국어 ????????? ?????????, 영어 Abhisit Vejjajiva)가 태국의 제 27대 총리로 취임했다.

아피싯 웨차치와 27대 태국 총리

2008년에는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탁신 친나왓 전 총리계의 구 연정 중심당인 ‘국민의 힘’이 선거법 위반으로 해산하면서 새 총리 선출을 위한 하원 호명투표가 치러졌다. 이날 치러진 선거에서 총 235표를 얻어 198표를 얻는 데 그친 타이 공헌당의 쁘라차 프롬녹 총재를 누르고 총리에 당선됐다. 이틀 뒤인 12월17일 라마 9세의 승인을 받아 정식 총리가 됐다.

1964년 8월3일 영국 뉴캐슬에서 출생한 그는 명문 이튼스쿨을 다녔으며 옥스퍼드 대학교 정치·철학·경제학과(PPE)를 졸업했다. 화교인 부모는 성공한 엘리트 의사이고, 그의 부인은 쭐랄롱꼰대 교수, 두 여동생은 각각 교수와 작가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1992년 그는 민주당에 입당, 타이 역사상 최연소인 27세로 하원 의원에 당선됐다. 부패한 정치 문화와 선을 긋는 ‘클린’ 행보로 차별화에 성공했다. 2001년 민주당 당수직에 도전했다가 패배했지만 수도 방콕과 남부 지역 중산층의 지지를 끌어내 2005년 당 총재에 당선, 그해 2월부터 민주당 총재를 맡았다.

2011년 잉락 친나왓과의 총리 경쟁에서 패해, 2011년 8월5일 총리 임기를 마쳤다.?오빠(탁신 친나왓, 제26대)와 여동생(잉락 친나왓, 제28대) 총리 사이에서 태국 총리를 지낸 셈이다.

2000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영구 폐쇄?

1977년부터 1983년에 걸쳐 건설된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가 가동 17년 만인 이날 영구 폐쇄됐다. 전력생산량 1000MW의 4개의 원자로 중 1983년에 준공된 제4기 원자로가 1986년 4월 폭발해 엄청난 방사성 물질이 누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500배에 이르는 엄청난 방사능 사고로 이어졌다. 안전절차를 무시한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사망자 3만 여명, 암이나 방사선 장애 등 수 만 명이 후유증에 시달렸다. 기형아 출산이 잇따랐다. 제4기 원자로는 사고 직후인 1986년 폐쇄됐고 제2기 원자로는 1991년, 제1기 원자로는 1996년에 차례로 폐기됐다. 2000년 12월 15일에는 제3기 원자로 가동을 중단,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는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원자로가 위치한 우크라이나의 레오니트 쿠치마 대통령은 미국 에너지 장관과 러시아 총리 등 세계 각국 인사 2000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3기 가동 중단 버튼을 누르면서 “모든 인류를 위해 체르노빌은 반복 돼서는 안 될 비극의 상징”이라며 “오늘 우리는 가장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의 전모를 밝힌 다큐먼터리 <한국=EBS>

1987년 아메드 야신, 하마스 창설

1987년 12월15일은 팔레스타인의 정치 지도자 아메드 야신(Shikh Ahmed Yassin, 1936~2004년)이 동료 7명과 함께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한 이슬람 저항운동단체 ‘하마스(HAMAS)’를 창설한 날이다. 야신은 어릴 때 사고로 사지가 마비돼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면서도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초등학교 교사, 사원 설교자로 일하면서 대(對)이스라엘 투쟁으로 3차례 투옥됐다. 타협 없는 무장 투쟁과 함께 가난에 허덕이는 팔레스타인인의 민생을 적극 지원해 뒷날 하마스가 자치정부를 장악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서방사회에는 테러집단의 수괴,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전설의 우상인 이유다.
생전에 그는 한국 잡지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에서 “예전 일제가 한국을 지배했을 때 한국 사람들은 자신의 순결한 투쟁을 테러리스트나 극단주의자의 난동으로 불렀는가. 조국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데 누가 테러리스트라고 부른다면 그 칭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영예로운 이름으로 간직할 것”이라고 썼다.
2004년 3월22일 이스라엘 총리 샤론(Ariel Sharon)이 지시한 이스라엘군의 로켓포 공격으로 살해됐다.

1971년 파키스탄 대표, 유엔 비난

칸 군사정권 시절에 외무부 장관과 유엔 주재 파키스탄 대표로 있던 줄피카르 부토는 1971년 12월15일 유엔 총회장 연설에서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유엔 안보리가 파키스탄 내정에 개입하는 것은 주권침해라는 게 비난의 뼈대였다. 당시 동서 파키스탄은 인도를 사이에 두고?1500km나 떨어져 있었다.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지지하는 인도와 전쟁을 벌였고, 안보리를 주도하던 소련도 인도와 같은 입장이었다. 결국 소련과 미국의 기권으로 종전안이 부결되자 유엔 대표들도 모두 회의장을 떠났다. 결국 동파키스탄은 같은 달 말 방글라데시로 완전 분리됐다.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된 데 책임을 지고 같은 달 20일 당시 아히야 칸 대통령이 사퇴하자 줄카피르 부토 당시 외무부장관이 대통령직을 인수했다. 국유화 등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했던 줄카피르 부토는 1977년 모하마드 지아 울 하크 장군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로 축출된 데 이어, 1979년 국가변란죄 판결을 받았고 이듬해 교수형에 처해져 죽음을 맞았다.

동서로 분리되기 전의 파키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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