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찬 연재소설] 살아가는 방법-38회

“제 생각에는 그게 라오스의 힘이 아닌가 싶어요.”
무숙자가 음료수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목이며 팔뚝이며 피부가 검게 그을리고 온 몸에 피로의 흔적이 쌓여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뭐가?” 마주 앉은 기준이 반문했다.
“왜 다들 라오스 하면, 순수하고 따뜻한 사람들의 나라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게 그저 하기 좋은 표현이라고만 생각했어요. 라오스도 이미 예전의 라오스가 아닐 것이다, 외국인들과의 교류가 많아지고 상업적인 문화가 많이 들어가니 때가 많이 묻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 직접 겪어보니까 그 표현이 맞네요.”
“응? 더 이상 순수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다고?”
“아니요, 곳곳의 산악 지역에서는 건설 장비가 돌아가고 도시에는 자본주의적인 문화가 퍼지는데도, 여전히 이곳의 사람들은 따뜻해요.”???????
귀국을 하루 앞 둔 연수단 일행이 왕위왕 시내 여행자 거리에서 자유 시간을 보내는 동안, 기준과 무숙자는 노천카페의 한 귀퉁이에 앉아 모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저녁 왕위앙의 거리는 오전부터 내린 비로 흠뻑 젖어 있었다. 오후 들어 비가 걷히자 여행객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마실 곳 먹을 곳을 온통 점령하고 시끌벅적 활기를 만들어냈고, 새로이 입성하는 여러 무리의 배낭객들도 재빨리 숙소를 정하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라오스의 힘이라……,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고양이와 눈을 맞추던 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색 길고양이 한 마리가 아무렇게나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은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실수도 많이 하고 일 처리도 느린데다가 ……, 손님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거기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고객들이 많지 않았거든요.”
“이번 연수에 참가한 단체객들은 처음부터 마음자세가 일반객들과는 좀 달랐기 때문 아닐까? 무숙자 자네의 사전 교육 덕분이 아닌가 말이지.”?
“뭐 그렇기도 하겠지만, 여기 직원들의 서비스나 현지 마을 주민들이 보여준 태도는 좀 특별했어요.” 무숙자가 특유의 쾌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
“일 처리가 세련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분위기가 남아 있어요. 그런데도 주눅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그들만의 자부심이랄까 자신감까지 드러내는 거예요.”?
“도대체 이건 뭐지? 그런 생각을 했겠군.” 기준이 말을 받았다.??????
“그렇죠.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죠.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보니 이 사람들이 우리 일행에게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은근한 배려심 같은 것을 느끼겠더라고요. 나중에 연수단 참가자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대부분 저와 비슷한 생각이더라고요.”
“뭐라고 했는데?”
“잡음은 있지만 인간적인 소리를 들려주는 LP판 같다, 가끔씩 삐걱거리기는 하지만 톱니바퀴가 잘 맞아 돌아가는 태엽 시계 같다고 해요. 어딘지 투박하고 촌스러운 것 같은데 그래서 더 믿음이 간다는 거죠. 그래서 저는 아, 이게 라오스의 힘이구나 했어요.”???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는 은근한 배려와 겸허한 자신감, 이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기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기준은 행사 기간에 라오스 현지인들이나 직원들이 보여준, 손님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직원 서로간의 자발적인 협력, 그리고 능동적인 대처 능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했다. 강 전무는 그동안의 강도 높은 훈련과 잘 짜인 시스템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 평가했지만 기준의 판단은 조금 달랐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특별한 요인이 작용했을 거라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거리에 가득 찬 인파 사이로 몇 대의 오토바이가 강렬한 배기음을 내지르며 지나갔다. 문득 생각난 듯이 기준이 말을 시작했다.?????????

“내가 이야기 하나 해 볼까? 교통 신호등에 대한 개똥철학 정도로 생각하고 한 번 들어봐. 요즘에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교통 신호를 제멋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많지?”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인 것 중의 하나가 교통사고 발생률이죠. 교통 신호를 위반하는 수준도 꽤 높을 걸요. 솔직히 저는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래 전에 일본에 갔다가 일본인들이 교통 신호를 철저하게 지키는 장면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어. 신호등 태도 하나를 보고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규칙을 잘 지키지 않는 입장에서는 규칙을 반드시 지키려는 그들의 문화가 참 부럽더군.”
“규칙을 제멋대로 어기는 것보다야 규칙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 발전된 문화겠죠. 하지만 저는 솔직히 일본처럼 규칙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그런 사회가 부럽지는 않아요. 규칙을 적용할 수 없는 예외적인 상황도 있고, 규칙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는 구성원의 행복을 위한 것인데 일단 너무 답답하잖아요.” 무숙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본 것은 일본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라. 그리고 규칙을 넘어서려면 먼저 규칙을 배우라는 말도 있어.”
“규칙은 당연히 지켜야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좋아,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하네.” 기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십 여 전 일이야. 미국 서부의 작은 도시에 갔다가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빨간불 신호가 너무 긴 거야. 에이, 보는 사람도 없는데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건너갈까, 아니 그래도 기다려야지 하며 한참을 더 기다리는데 마침 건너편에 작은 아이가 나타났어. 그런데 그 애는 건널목으로 다가오더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신호등 기둥 옆에 있는 뭔가를 누르는 거야. 그랬더니 바로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더군.”
“ …… 얼마나 황당하셨을까.” 무숙자가 웃었다.?????????????????
“물론,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일본식의 엄격한 규칙주의를 보완하는 힌트를 얻었어. 역시 미국인들의 실용적인 사고는 본받을 점이 있더군. 기본적으로는 규칙적인 신호등 체계를 바탕으로 하되, 특별한 상황에서는 사람이 버튼을 눌러 신호를 통제할 수 있게 하자, 그러면 엄격한 규칙주의를 보완할 수 있다.”
“형님, 옛날에 혹시 교통공무원에 뜻이 있으셨나요?”
“아니, 전혀.”?
“공무원 하지 않기 정말 잘하셨어요. 만약에 형 말처럼 신호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버튼을 설치해주었다면 아마 도로마다 차가 막혀서 난리가 났을 거예요. 사람들이 신호를 기다리기 싫어서 버튼을 마구 누르고, 차들은 처음에는 왜 함부로 버튼을 눌렀냐고 화를 내다가 결국은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다가 사고가 나고 …… ”?????????
“흠, 그 정도는 아닐 거야. 버튼에 무조건 우선권을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기준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무규칙보다는 규칙이, 엄격한 규칙보다는 예외를 허용하는 규칙이 더 우수한 제도가 아닐까. 그게 더 합리적 시스템인 것이고 사람에게도 더 편할 것이다. 결국 더 합목적이고 효과적이다.”
“형은 정말 못 말리겠어요. 신호등을 보면서 왜 그런 고민을 사서 하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에서 맴돌던 생각거리였어. 그 얼마 후 프랑스 남부 니스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도 물론 신호등이 있으니 유심히 살펴보았지. 그런데 사람들이 교통신호를 잘 지키지 않더라고. 선진국이라는데 왜 이렇지? 그랬어.”??
“교통 신호도 제대로 못 지키는 데 무슨 선진국이야, 그렇게 말이죠? 갑자기 이야기 하나 생각나네요. 프랑스에 처음 간 관광객이 파리 사람들이 거리에 휴지를 마구 버리는 걸 보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내가 휴지를 버려야 거리의 청소부가 일거리가 생긴다고 했다는.”
“다 이유가 있을 거다? 그야 당연하지. …… 아무튼 조금 더 들어봐” 기준이 손을 저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분명히 신호등이 빨간불인데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건너가고, 차들은 또 차들대로 사람들이 건너야 할 신호에 정지하지 않고 슬금슬금 그냥 가는 거야. 한 마디로 엉망인 거지. 문화의 왕국답게 거리에는 멋지게 디자인을 한 신호등이 서있는데 저게 도대체 왜 있나 싶더라고. 이건 교통신호를 지키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하던 우리나라보다도 한참 더 뒤지는 거야. 그런데 자세히 보니 거기에 나름대로 패턴이 있더라고. 이를테면 건널목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차도가 한산하다, 그럴 때 사람들이 신호를 무시하고 길을 건너가더군. 차도 알아서 정지를 해주고. 그와 반대로 도로에 차량이 가득한데 건널목에 기다리는 사람에 적다, 그 때는 또 차들이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달리고 말이야. 교통 신호를 제대로 지키는 게 아닌데도, 혼란스럽지는 않더란 말이지. 한국이나 일본, 미국의 신호등 사례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뭔가 차원 높은 적용의 사례가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고.” 기준이 알아듣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미국식의 실용적인 변형과는 또 다른 변형의 사례이군요.” 무숙자가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일반화시키는 건 무리가 아닐까요?”
“지금 이야기는 교통 신호에 대한 지극히 사적이고 피상적인 인상기일 뿐이야. 하지만 이상하게도 혼잡한 거리를 보면 신호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거든.”????????
“신호등 강박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나는 교통신호를 대하는 태도를 네 가지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임의적 질서, 엄격한 질서, 실용적인 질서, 그리고 유연한 질서 이렇게 이름을 붙여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한국은 임의적 질서, 일본은 엄격한 질서, 미국은 실용적인 질서 그리고 프랑스는 유연한 질서가 되겠네요.”????
“그리고 임의적 질서 상태는 유연한 질서와 겉으로는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
“하지만 그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 말이죠?”??????
“역시, 너하고는 말이 잘 통해.” 기준의 얼굴에 꾸밈없는 웃음이 퍼졌다. “그러면 이제 이야기의 핵심으로 가볼까?” 무숙자가 바로 말을 받았다. “그러시죠.”???
“임의적 질서와 유연한 질서, 그 두 단계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차이를 만드는 요인이라’ 무숙자가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큰 소리로 물었다.
“아, 그런데 그게 제가 말한 라오스의 힘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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