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2일] 홍콩 디즈니랜드 개장한 날

2007년 필리핀 법원, 에스트라다에 종신형

2007년 9월12일 필리핀 법원은 조지프 에스트라다(당시 70세) 전 대통령이 재임 중 부정축재를 저질렀다며 종신형을 선고했다. 필리핀 산디간바얀 반부패 특별법원은 “6년여에 걸친 심리 결과 에스트라다가 대통령 재직시에 뇌물과 리베이트 등을 받는 방법으로 수천만 달러를 축재한 혐의가 인정된다”며 이같이 판결했다. 법원은 공판 기간 동결됐던 그의 은행계좌에서 8700만 달러를 몰수했다.

그러나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그의 지지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나중에 그를 사면했다. 그 후 그는 아로요 대통령 축출에 나서겠다고 밝혔고 2010년 대선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다만 그의 아들 조지프 에스트라다 2세가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2001년 1월 글로리아 아로요 당시 대통령이 주도한 ‘2차 피플파워’ 시민운동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축출 당했다. 축출된 뒤 그는 자신의 후임자인 아로요 현 대통령과 가톨릭교회, 비즈니스 엘리트 등 세력이 자신의 대중적 기반을 시기해 모함에 빠뜨렸다고 항변해왔다.

에스트라다 전 대통령은 필리핀 영화제에서 5차례나 남우주연상을 차지한 영화배우 출신 정치인이다. 영화 속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배역을 맡아 대중적 인기를 끌어모았으며 1969년 산후안시 시장에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된 뒤 상원의원을 지냈다. 1998년 5월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40%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2005년 홍콩 디즈니랜드 개장

2005년 9월12일 홍콩 디즈니랜드가 개장했다. 이날 홍콩정부와 미국 월트디즈니사는 쩡칭훙(曾慶紅) 중국 국가부주석과 도널드 창(曾蔭權) 홍콩 행정장관, 그리고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 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장식을 가졌다.

관람객들은 개장식이 끝난 직후인 오후 1시부터 입장하기 시작했다.

홍콩 디즈니랜드는 월드디즈니의 11번째 테마파크이자 도쿄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 디즈니 테마파크로, 홍콩 정부와 월트디즈니사가 약 200억 홍콩달러(한국 돈 약 2조6000억 원)을 들여 합작으로 건설했다. 첫 삽을 뜨고 개장까지 꼬박 6년이 걸렸다.

홍콩 최대 섬인 란타우섬 북부 페니베이에 자리 잡은 디즈니랜드는 판타지랜드 등 4곳으로 구성된 테마파크와 호텔 2채, 쇼핑몰, 음식점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개장에 앞서 전용 열차 노선도 개통됐다. 면적 126㏊로 디즈니 해외 테마파크 중 가장 작고 성인 기준 자유이용권이 399홍콩달러(약 5만7963원, 2012년 9월12일 현재)로 5개 해외 디즈니랜드 중 가장 싸다.

주로 중국 본토와 동남아의 가족 관광객을 겨냥하고 있는 홍콩 디즈니랜드는 동서양의 조화를 주제로 전통적인 디즈니 캐릭터 주인공들과 함께 중국과 기타 아시아 문화를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1986년 제31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서울서 개막

인도네시아 테구 카르야(Teguh Karya) 감독.

1986년 9월12일 제31회 아시아ㆍ태평양 영화제가 서울에서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주관으로 열렸다. 이날 서울 능동 리틀엔젤리스 예술회관에서 개막을 갖고 15일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시상식과 축하공연으로 막을 내린 이번 영화제는 주최국인 한국을 비롯, 13개 회원국 중에서 291명의 대표단과 함께 극영화 32편, 문화영화 11편이 출품됐다.

영화출품국은 태국ㆍ홍콩ㆍ인도네시아ㆍ말레이지아ㆍ인도ㆍ한국ㆍ호주ㆍ자유중국ㆍ일본 등 9개국, 한국에선 <중광의 허튼소리>, <겨울 나그네>, <뽕>, <어미>, <꽃지> 등이 출품됐고 다른 나라의 출품작 중에서 12편이 선정돼 서울 국도극장에서 공개시사회를 가졌다.

9월15일 가진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은 인도네시아 <추억의 유품(감독 테구 카리아, Teguh Karya)>이 차지했다. 감독상은 <그 여자의 일생>을 연출한 대만의 창이 감독에게 돌아갔다. 영화제의 하이라이트인 남녀주연상은 <회색의 황혼>(일본)에서 퇴직 후 방황하는 노인 역할을 맡은 지아키 미노루와 한국영화 <뽕>에서 열연한 이미숙이 각각 수상했다. 한국은 이밖에 음악상과 특별아역상을 받았다.

1982년 중국, 당주석제도 폐지…당총서기에 후야오방 선출

1982년 9월12일 중국의 후야오방(胡耀邦, 1915년 11월20일~1989년 4월15일)이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선출됐다.

후난 성 창사 출신으로 1928년 공산청년단에 가입, 나중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후에 마오쩌둥과 주더가 이끄는 홍군에 가담, 초급장교로 복무했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마오와 주더를 대신해 당권을 장악한 친소련 성향의 지도부(28인의 볼셰비키)는 마오에 충성하던 그의 성향을 불신, 체포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그를 아끼던 다른 지도자의 도움으로 석방됐다.

장궈타오의 부대의 일원으로서 장정에 참가했지만, 그의 부대가 국민당에 충성하는 회족 마부팡 군벌군에게 패해 포로가 됐다. 그 뒤 마부팡의 영지에서 강제노역을 하다, 다른 포로와 함께 탈주해서 공산당 지도부가 있던 옌안으로 복귀했다. 이후 정치장교로 홍군에서 복무했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지방의 당과 행정기관을 오가며 일하다 1975년 중국과학원 부원장을 맡으며 중앙 정치에 진출했다.

1977년에는 중국공산당 조직부장의 요직을 맡으며 마오쩌둥 사후 덩샤오핑의 지원를 받아 중국 최고지도부의 한사람으로 떠올랐다. 1981년에는 중국공산당 주석을 맡았다. 이후 주석직이 폐지되고 총서기제가 도입되어 그는 계속 총서기를 맡았다. 그는 급진개혁파로서 민주화를 시도했으나, 보수적 원로그룹의 역공을 받아 1987년 사임을 강요당해 자리에서 물러났다. 후임 총서기는 자오쯔양이 맡았다.

1989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75세였다. 그를 추모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5.4운동 70주년을 맞아 베이징에서 집회를 열어 전면적인 민주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원로그룹의 결단으로 무자비하게 진압됐다. 이른 바 ‘텐안먼 사태’였다. 집회를 방문하여 이들에게 동정적 발언을 한 자오쯔양도 실각했다.

1977년 남아공 흑인 인권운동가 비코 사망

1977년 9월12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인권운동가 비코(Biko Stephen, 1946년12월18일 출생)가 사망했다. 남아공 공안당국은 굶어죽은 것으로 발표했지만 인종차별주의자들에 의한 고문에 따른 사망이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떠오르는 흑인 인권운동가다. “검은 것이 아름답다” “당신은 지금 존재만으로 충분하다. 한 인간으로 자신을 바라보라” “열등감에서 벗어나라”는 말을 남겼다.

1960년대 초 흑인 지도자 넬슨 만델라와 로버트 소부퀘가 수감된 뒤 남아공 흑인 운동은 구심점을 잃은 채 비틀댔다. 이때 비코가 흑인의 자긍심과 존엄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흑인 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나탈대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그는 남아프리카학생동맹(NUSAS)에서 활동하다가 이 단체가 흑인 학생의 요구를 대변해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탈퇴했다. 1968년 남아프리카 전흑인학생연합(SASO)을 설립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으며 1972년 퇴학당한 뒤 전업 활동가로 나섰다.

비코는 여러 조직과 운동을 이끌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 남아공 백인정부의 탄압을 받는다. 보안관찰 처분으로 집필과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고 거주가 제한됐으며 여러 혐의로 수차례 체포와 구금을 겪었다.

1977년 8월, 스티브 비코가 죽기 한 달 전 도로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며칠 뒤인 9월11일 보안경찰 건물인 샌럼빌딩 619호로 끌려갔다. 쇠창살에 묶인 채 22시간이 넘도록 고문과 구타를 당한 그는 심각한 뇌손상을 입고 만다. 경찰은 의식이 없는 비코를 알몸 그대로 랜드로버 뒷좌석에 방치한 채 1500km나 떨어진 병원으로 싣고 갔다. 그리고 이튿날인 9월 12일, 서른 살 짧은 생이 끝났다.

경찰은 사망 원인이 7일간의 단식으로 인한 쇼크라고 발표했지만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젊고 유망한 흑인 지도자의 죽음은 남아공에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잔혹한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에 세계 각국의 비난이 쏟아졌다. 비코의 장례식에는 1만5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몰려들었는데 미국과 서유럽 지역의 대사와 외교관도 자리를 함께했다.

고인의 절친한 친구이자 남아공 신문 ‘데일리 디스패치’의 편집장이던 도널드 우즈는 시신 공시소에서 촬영한 비코의 사진을 공개했다. 머리 부분의 심한 상처는 의문사라는 덮개를 들추는 명백한 증거였다.

남아공 정부는 우즈에게 비코와 같은 보안관찰 처분으로 대응했고 공개 활동을 금지시켰다. 우즈는 삼엄한 감시 속에 국외 탈출을 감행했고 영국 망명 생활 동안 비코의 삶과 투쟁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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