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원의 포토차이나] 중국무술의 산실 ‘소림사’

소림사 가는 길, 숲길이 조성되어 있다.

[아시아엔=글 사진 강위원 사진작가] 젊은 시절 무협지를 즐겨 읽으면서 소림사(少林寺)와 달마(達磨)대사를 알게 되었지만 그곳이 일반인들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북경에 체류하던 2007년이었다.

소림사 산문 앞에는 석비가 숲을 이루고 있다.

소림사는 하남성(河南省)의 성도인 정주(鄭州)에서 서남쪽으로 약 80km거리, 등봉(登封)시의 북쪽 15km에 있는 숭산(嵩山) 속에 자리잡고 있다.

숭산은 태산(泰山), 화산(華山), 항산(恒山), 형산(衡山)과 더불어 전국시대 이후 오행사상(五行思想)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오악(五岳)의 중심인 중악으로 부르는 영산(靈山)이다. 정상에는 도교의 사묘(祀廟)가 있으며 중화민국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해마다 국가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소림사 경내의 석비, 다양한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서기 464년, 발타선사(跋?禪師)라는 인도의 고승이 중국에 와서 불법을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북위의 효문제의 명으로 495년 공사를 시작하여 소림사가 창건되었다.

당시 소림사에서는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들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선종의 교리가 완성된 곳이기도 하다.

소림사 곳곳에는 이중 지붕 형태로 기와를 이었다.

임제종(臨濟宗)의 대가람으로 창건할 당시 소림사의 구조는 단순했다. 왕조가 바뀔 때마다 증축을 거듭하였는데 현재의 구조는 주로 명대와 청대의 것이 대부분이다.

고루(鼓樓)인 초조암(初祖庵)은 원나라 때 건물이고 본전은 송나라 때 건물인데 본전 내부에 인왕과 용 등을 부각한 석주가 유명하다. 이 석주 외에 다수의 당·송 이후의 석비, 동위(東魏)의 삼존불, 북제(北濟)의 조각상 등 200기 이상이 남아 장관을 이루고 있다.

본전과 고루가 보이는 경내의 모습.

중요한 건물은 산문, 종루, 본전, 고루, 대웅전과 천불전 등이 있는데 천불전의 벽화는 오늘날까지도 보존 상태가 좋다.

탑림의 모습, 인근에 높은 지형이 없어 탑림의 전체적인 위용을 담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부도에 해당하는 탑림(塔林)이 있다. 탑림은 다양한 형태의 탑들이 246개의 묘소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중국 건축사상 가장 위대한 프로젝트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탑림 구조상의 다양성과 선종의 발생지가 더해져 소림사는 중국의 가장 중요한 불교 유적 중 하나로 손꼽힌다.

탑림 부근의 과일장수.

소림사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무술이다. 소림사 창건당시 발타선사는 불교의 참선을 보완하는 수행 방법으로 무술을 도입하였는데 달마(達磨)대사가 530년부터 9년간 여기서 면벽수련을 했다는 사실로 더욱 유명해져서 소림사를 세상에 알리는 단초가 되었다.

그는 약해진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수련에 들어갔는데 수련을 하는 과정에서 점차 무술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의 면벽수련은 움직이지 않는 벽처럼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수련법인데, 너무나도 유명한 소림무술의 상징이 되었다.

소림사 입구 무술학교.

소림사 주변에는 전통 소림무술을 가르치는 수십 개의 무술학교가 있으며 중국 전역에서 무술 수련을 희망하는 학생들이 몰려들며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와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중국 무술의 산실이다.

무술학교의 숙사와 교련장.

아침에는 수련생들이 조회를 마치고 각자 정해진 수련장으로 향하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극장에서는 시간대별로 무술경기를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공연하고 있다.

극장의 무술 공연 모습.

매년 9월에 열리는 소림 무술제에 참여하면 중국 정통 무술의 매력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전국에서 모인 무술 단체가 실력을 겨루기도 하고 시범을 보여 주기도 하는데 영화배우 이연걸이 이곳 소림 무술제에서 우승한 바 있다.

관광객들에게 무술 수련의 기본을 가르치고 있는 스님.

소림사 인근에는 정주, 낙양(洛陽), 허창(許昌) 등 고대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 많다. 삼국지의 배경으로도 유명한 고대 중국 역사의 중심이 된 이곳의 배경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황하가 있다.

정주는 황하의 하류 남쪽에 있다. 황하는 잦은 범람으로 홍수와 같은 재난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비옥한 토지를 선사해 일찍이 공동체 생활에 눈뜨게 하는 등 안정적인 문화의 토대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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