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후 안개 더욱 짙어진 튀니지”


<인터뷰> 튀니지 현지에서 ‘자스민 혁명’ 목도한 정상호 전 마누바대학 교수

이집트, 리비아, 시리아, 바레인 등 중동 민주화혁명의 도화선이 된 튀니지의 ‘자스민 혁명’ 당시부터 최근까지 현지에 머물면서 혁명 전후의 상황을 지켜본 한국 출신의 한 학자는 “혁명이후 튀니지는 더 나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서울 명륜동 아시아엔(The AsiaN) 사무실에서 만난 정상호 전 튀니지 마누바대학 교수(경제발전론)는 “이집트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은 뒤 정치도 경제도 혁명 전 보다 악화된 것 같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정상호 교수는 부아지지가 분신자살한 시디 보우지드(Sidi Bouzid)에서 차량으로 4~5시간 떨어진 튀니지 중부 마누바에 살았지만 혁명 전후 집회와 시위가 잇따르던 지역에서 대학교수로 5년간 일했다. 그의 집은 집회와 시위가 열리던 부르기바 대로에서 15분 거리였고, 시위대의 함성과 경찰의 총격 등 이른바 ‘혁명의 필수 효과음’들을 집안에서 고스란히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외신보도에 따르면, 당시 마누바 지역에서도 수많은 학교가 불타고 지역 사립학교에 재직 중이던 폴란드 신부가 옛 체제 하수인들(벤 알리의 사병조직)에 의해 살해됐다.

유로피언 드림 찾아 목숨 걸고 바다 건너는 젊은이들

“쓰레기를 치우고 도로교통 정리를 하는 따위의 공공행정에서 기초질서가 무너졌어요. 여름동안에는 어디를 가든지 냄새가 코를 찔렀고, 도로는 곧잘 차들과 사람이 뒤엉켰지요.”

‘빵 값이 너무 비싸다’는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해 불붙은 혁명이 정권을 갈아치웠지만 혁명 이후 물가, 특히 생필품 가격은 더 치솟았다.

인구 1000만, 1인당 국내총생산(GDP) 3500달러인 튀니지는 인접 산유국들과는 달리 석유가 나라살림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체 수요를 충족하기에도 모자란 것. 식가공업과 의류 등 간단한 제조업을 주문자상표착용(OEM)방식으로 만들어 유럽에 수출하는 비중이 크다. 한국과 자동차 생산을 시작한 시기가 비슷하고 유럽연합(EU)이 관세도 면제해주지만, 튀니지산 자동차는 여전히 1970년대 단순조립?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의 자동차가 세계 5위권으로 부상하는 사이에 말이다. 튀니지에는 한국의 현대 계열 부품회사가 있다. 여기서 만든 부품으로 슬로바키아 기아자동차 공장에서 조립, 출시한다.

“물가는 혁명 전보다 더 올라갔습니다. 벤 알리 정권은 한 마디로 ‘너희가 나만 따라오면 굶어죽지 않게 해준다’는 식이었지요. 생필품 가격은 계속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정책기조였던 것이지요. 튀니지에서 바게트 빵 하나에 200원 정도면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혁명 이후에는 식료품 가격도 들썩이고 다른 물가는 많이 올랐습니다.”

튀니지 정부 재정은 파탄 직전이라고 한다. EU가 10억 유로를 원조해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국제곡물가가 들썩이고 있어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이라고 한다.

튀니지 청년들의 가장 큰 꿈은 어떻게든 유럽으로 건너가는 것. 한 달에 2000유로(한국 돈으로 약 290만원, 9월10일 기준)쯤 벌어서 1000유로는 튀니지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내고 나머지 1000유로는 자신이 쓰고 저축하는 것이 꿈이다. 리비아로 건너가서 조각배를 타고, 이태리 람페두사섬까지만 가면 적십자 요원들이 주선해서 이태리 본토로 데려다 준다. 최근 너무 많이 몰려와 쉽지 않은 경우도 있고, 더러 배가 뒤집혀 죽는 일도 허다하지만 ‘월 2000유로’의 꿈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그런 걱정쯤은 날려버린다.

“조금 눈썰미가 있고 공부를 한 젊은이라면 서울이나 도쿄 행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최근 만난 20대 초반의 튀니지 젊은이는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하더군요. 일본 물가가 한국보다 비싸다는 점도 꿰고 있는 영민한 젊은이였죠.”

죽(민주주의) 쒀서 개(살라피스트)를 줘?

튀니지 국화의 이름을 딴 ‘자스민 혁명’은 튀니지의 한 과일 노점상이 단속 공무원에게 구타와 모욕을 당한 뒤 이에 항의, 분신자살하자 국민들이 높은 인플레이션과 1987년 이래 24년간 지속돼온 철권통치에 맞서 봉기를 일으켜 독재자를 물러나게 한 사건이다.

2010년 12월17일, 튀니지 수도 튀니스 남쪽 300km에 위치한 중부 시디 부 지드에서 26세 남성 모하메드 부아지지(아랍어: ???? ?????????)가 분신자살한지 19일 만에 사망했고, 경찰이 그의 장례식을 가로막자 대중시위가 시작됐다. 그의 사망 열흘 뒤인 2011년 1월14일 튀니지 노조가 총파업했고, 국가비상사태가 선언됐지만 바로 이날을 넘기지 못하고 벤 알리 당시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이집트와 리비아 등 튀니지와 비슷하게 장기 집권하는 독재정권들을 잇따라 붕괴시킨 민중혁명이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튀니지 국민들의 상당수는 이슬람근본주의자(살라피스트)들과 새 집권 세력의 차이를 잘 모른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알제리나 터키처럼 ‘세속주의’ 전통이 없는 나라에서는 당연한 현상이다.

이슬람정당인 집권 엔나흐다는 41%의 지지를 받았다. 그런데 집권 경험이 전무하다. 국민통합을 위해 여전히 무슬림의 교리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무슬림이라는 화두에서는 살라피스트들의 농간을 차단할 재간이 없다. 경험도 없고 명분도 없는 집권 세력의 고민은 깊어만 가고 있다.

“벤 알리 잔당들이?장난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경험이 없는 세력들에게 일단 권력을 줘놓고 개판을 치도록 방치해놓고 나중에 탈환해 더 공고한 권력을 만들려는 속셈이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이슬람으로, 근본으로 돌아가자”

도시 지역에서는 그나마 민주화와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열정이 충만했던 젊은 혁명세력들이 많았지만 시골로 갈수록 혁명에 붙는 물음표가 또렷해졌다.

“남쪽에 마트마타 사람들하고 어울릴 기회가 있어서 ‘왜 엔나흐다 정당에 투표를 했느냐’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한 사람이 ‘독실한 무슬림이니까’라고 말했고, 이내 주변 사람들 모두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군요. 도무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더군요.”

제정분리 전통이 없는 튀니지에서 혁명 이후 사회심리는 “종교적 경건함으로 세속의 이해관계를 추스르자”는 쪽으로 모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몇몇 젊은이들은 과거 사진 찍는 것조차 “교리에 어긋난다”며 금지했던 전통을 되살리자고 주창한다. 자유와 민주주의 대신 이슬람 교리와 형식을 중시하는 쪽으로 가자는 것이다.

여자들 사이에서도 “히잡을 쓰자”는 움직임이 눈에 띄게 일고 있다. 이슬람 국가들 중에서 가장 유럽에 가까웠던 튀니지가 복고주의, 아니 이슬람원리주의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튀니지는 원래 부르카를 금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제가 강의했던 마누바 대학 여대생들도 최근 부르카를 쓰고 수업에 들어오더군요. 대학당국이 대리출석이나 부정행위 가능성 때문에 부르카를 쓰지 말라고 재차 만류하자, 이번에는 남학생들까지 나서서 학내시위에 나섰습니다. 총장실을 점거하고 며칠 시위를 하더니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더군요.”

집권 엔나흐다당은 개헌을 추진하면서 “샤리아(Sharia, 코란과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기초한 이슬람 율법)를 국법으로 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혁명 지지 세력에게 거듭 약속했다. 그러나 요즘 분위기로 봐서는 이런 약속을 지키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튀니지에는 요즘 샬와르 카미즈라는 파키스탄 의상이 유행합니다. 탈레반들이 입던 옷인데, 마치 그것을 입는 것이 정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얘기이지요. 남자들 사이에서는 수염을 더럽게 기르는 것도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요. 이슬람정통으로 돌아가자는 거죠.”

튀니지에서 계속 느리고 여유롭게 살 수 있을까?

정상호 교수는 마누바 대학 교수로 있던 2009년 튀니지 여성과 결혼했다. 튀니지 국적의 여성과 결혼을 하려는 외국인 남자는 무슬림으로 개종을 해야 한다. 정교수도 그래서 무슬림이 됐다.

지난 7월 중순 튀니지 생활을 완전히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해 맞은 라마단 기간도 아내와 함께 했다. 집이며 세간을 채비하느라 보름 정도만 라마단에 참여했다고 한다. 다 못 채운 라마단 기간은 나중에라도 채워야 한다.

“하루 종일 굶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라마단 규율을 지키려면 금식 직전까지 엄청나게 먹어대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오히려 무슬림 중 비만인구도 많죠.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교수는 ‘빨리빨리’와 성과주의에 찌든 한국을 떠나 5년여 간 튀니지에 살면서 카르타고와 로마 유적, 신화에 등장하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고 한국에 돌아왔다. 무엇보다 연중 며칠을 제외하고는 짙푸르고 맑은 하늘 아래서 맞이하는 아침의 황홀함을 만끽했다. 튀니지에 있는 동안 저비용으로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는 점은 분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화 혁명 이후 튀니지가 어떤 역사를 새로 써 나갈 지는 아직 모르겠다고 한다. 가뜩이나 일자리가 없는 나라 튀니지에서 종교권력이 움트니 저비용(Low cost) 기반도, 느릿느릿한 자유주의도 잠자코 눈치만 보고 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