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 칼럼] 북일관계 관건은 ‘납북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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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말, 북한과 일본의 공식 회담이 4년 만에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틀로 예정됐던 이 회담은 막판에 하루 연장됐고 8월31일 마지막 회의가 열렸다. 의제도 북일 문제와 관계 없고 참석자들도 고위층이 아니어서 언뜻 주목할 게 없어 보이지만,?이 회담이 다가올 변화의 조짐이 될 수도 있다.

이번 회담은 표면적으로, 일제 강점기가 끝난 1945년 이후 북한에 남아 있는 일본인 묘지와 무덤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열렸다.?해방 무렵 한국에 거주하던?9만 명의 일본인 등이 그곳에 묻혔다. 이들의?유골 수습 가능성과 일본인 유가족들이 북한에서 성묘를 할 수 있을 지를 의논하기 위한 자리였다.

하지만 몇가지 오해가 있다. 이번 회담은 북일관계에 존재하는 더 큰 문제들을 협상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피랍에 관한 것인데, 북한 국가정보원이 납치한 8명 이상의 일본인 송환 문제는 오랫동안 교착상태였다.

북한은 특이한 나라다. 1970년대 김정은의 할아버지인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 통치에 있을 땐 더욱 그랬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북한의 납치작전은 가장 기이한 것이었다. 납치 대상은 정치와도 관련 없이 무작위로 선택됐다. 일부 희생자들은 미성년자도 있었다. 납치 이유는 아직도 할 수 없지만, 북한 국가정보원이 일본 간첩을 양성하기 위해 언어 강사들을 납치한 것으로 보인다.

피랍자 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일본 일부 시민단체들은 수십명의 일본인들이 납치됐다고 주장하지만 공식적으로는 17명이다.

일본 해변에서 일본인들이 실종된 사건에 대해 그동안 북한은 연루되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모든 것은 반동분자들의 선동이라고 줄기차게 얘기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납치의 증거들도 많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2002년 9월, 북한이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꿨다. 김정일은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13명에 대한 피랍사건이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얘기했다. 또 그 불행한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했다고 말했다. 또 김정일은 납북자 5명의 귀국을 허락했고, 나머지 납북자들-북한 주장은 8명, 일본 주장은 12명-은 2002년에 사망했다고 공식화했다.

대부분의 일본 국민들은 이런 얘기들을 믿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의 사망률이 너무 높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랍 문제에 대해 북한의 정책은 명확하다. 간첩교육을 확실히 받은 사람만 귀국시킨 것이다. 또 비밀공작에 관여한 것 같은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다고 얘기했다.

김정일은 피랍을 공식화하면서 일본이 그의 진심을 반가워하고 고마워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또 이로써?일본과의 불행한 역사를 넘겨버리고 새 시대를 열 수 있으리라고 믿었을 것이다.?일본의 엄청난 원조를 받고 더 나아가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손해배상금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외교의 세계에서 정직이 최선의 방책은 아니다. 무고한 일본 시민들이 피랍됐다는 것을 알게된 일본은 분노했다. 게다가 북한이 나머지 납북자들을 일본으로 귀국시키거나 생사를 증명할 의도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더욱 격분했다. 그 결과 일본은 ‘제재 조치’를 취하고 북한으로 보내려던 대부분의 지원을 중단했다. 북한과의 교류는 급격히 축소됐고, 이익을 보려던 북한은 오히려 일본에게 크게 당하게 됐다.

그런데도 북한은 단호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옳은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북한은 정직한 리더십이 보상 보다는 혹독한 벌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북한은 생존한 일본 납북자들을 풀어주는 것이 일본과의 관계에서 추가로 타격을 가져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북한의 간첩기관이나 비밀공작에 참여한 납북자들은 명확한 사실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북한 정부는 강경한 태도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정치인과 외교관들은 피랍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즉 생존 납북자들이 돌아올 때까지, 북한과의 거래를 고집스럽게 거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북한과의 거래를 중단하는 것은 일본이 북한과 외교협상 자체를 차단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다시 협상 개시를 논의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 측에서는 타협의 의지가 좀 더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북한은 2002년 이미 결정적인 양보를 했고, 뒤따르는 보상을 예상했다. 좀 더 양보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려면 보상이 확실히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바뀌면서 긴장은 완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운 젊은 지도자는 일본에게 어느 정도 양보를 하며 북한을?이끌어 온 오랜 관료들의 비타협적 태도를 비난할 수 있다. 그는 분명 ‘바깥 세상’과의 관계 개선을 원하고 있다.

한편으로 일본이 이런 양보를 받게 된다면, 고위 정치인들은 북한 측의 양보를 정당화하면서 외교의 돌파구로 삼을 것이다. 또 일본 정부는 한국에서 체면을 세우며 한반도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데 이용할 것이다.

이는 베이징 회담이 타협으로 가는 첫 단계가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담이 확실한 결론을 내진 못했지만 고무적인 점도 있다. 가까운 시일 안에 북한과 일본이 국장급 본회담 개최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북한에서 사소한 논쟁들이 일어나긴 했다. 지금까지는 일본 측만 회담 관련 성명을 발표했고, 다음 협상에서는 ‘상호 이익에 관한 다양한 문제들이 논의될 것’이라는 사실이 언급됐다. 이런 내용이 보도되자 일본에서는 다음 북일회담에서 피랍사건이 논의될 것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이런 확신이 섣부를 수도 있지만 북한이 다음 회담에서 일본인 피랍사건 이야기를 거부만 할 것 같지도 않다. 어쨌든 ‘다양한 문제들’은 애매한 것이고, 분명한 것은 피랍사건이 직접적으로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북한과 일본이 회담 재개에 동의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다. 진전되려면 수개월, 혹은 수년이 더 걸리겠지만, ‘모든 피랍자들의 귀환’이라는 최종 목표는 이루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도 회담은 북일관계 발전에 이바지할 가능성이 높고, 북한의 새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번역=송지원 인턴
정리=박소혜 기자 news@theasian.asia

*원문은 아시아엔(The AsiaN) 영문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www.theasian.asia/?p=3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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