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3일] 베트남 민중의 아버지 호치민 영면에 들다

2005년 日 ‘피스보트’, 51번째 지구촌 일주 항해 시작

2005년 9월3일 오전 일본 평화단체 피스보트의 51번째 지구촌 일주 항해가 시작됐다. 요코하마를 떠난 토파즈호에 오른 피스보트 활동가와 각국의 시민운동가, 일반 참가자 등 1052명은 앞으로 105일 동안 아시아-아프리카-유럽-라틴아메리카-남태평양 항로를 따라 17개국을 방문한 뒤 12월15일 요코하마항으로 돌아왔다.

피스보트(Peace Boat)는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비영리단체. 평화 증진, 인권, 평등, 지속 가능한 발전, 환경보호를 위해 일한다. 글로벌 교육 프로그램, 공정 무역, 협력 프로젝트, 변호 활동 등을 한다. 다른 시민단체나 일본의 커뮤니티, 동북아시아 등 국제적으로 수행해 나간다. 이들은 주요 활동을 세계를 여행하는 배인 피스보트로 수행한다. 피스보트는 중립적이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국경이나 언어에 상관없이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일본에 7개의 피스센터, 스위스 제네바에 1개를 갖고 있다.

1982년 한일 교과서 파동을 계기로 일본에서 배운 역사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가진 일본의 젊은이들이 직접 현지에 가서 역사문제를 확인해보자고 생각한 것이 피스보트 결성의 출발점이 됐다.

1983년 9월 초 젊은 평화운동가들이 일제의 식민지배 현장을 2주 가량 둘러보는 항해에 나선 것을 계기로 닻을 올렸다. 이 단체 요시오카 다쓰야 공동대표는 “항해가 거듭될수록 아시아에 머물렀던 관심이 점차 전세계로 넓어졌다”며 “90년 11월 제10차 항해 때부터 세계일주 코스를 마련하면서 분쟁과 갈등은 물론 환경·인권·빈곤·여성 등 지구촌이 직면한 모든 문제로 외연을 넓히게 됐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피스보트를 거쳐간 이들은 모두 2만5000여명이며, 100여 국 시민운동가와 지식인 등이 항해에 동참했다.

2004년 344명 죽음 부른 러 베슬란 학교 인질 사태

2004년 9월3일 러시아 세베로오세티야 공화국 베슬란의 베슬란 제1학교에 인질로 잡혀 있던 7~18세의 소년 소녀와 그 보호자 등 1181명이 인질들 중 386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졌다. 사망자 중 186명이 아이였다.

이틀 전인 9월1일 인질극을 시작한 이치케리아 체첸 공화국의 독립파를 중심으로 하는 다국적 무장 집단과 대치해오던 러시아 치안부대는 이날 전격적인 구출작전을 개시, 총격전이 시작됐다. 치안 부대가 건물을 확보해 상황이 종료됐을 땐 인질 중 386명이 사망하고 7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대참사, 대학살이었다.

사태의 주모자는 체첸 무장 세력의 지도자인 샤밀 바사예프(Шамиль Салманович Басаев, 1965년~2006년, 아래 사진)로 밝혀졌다. 러시아의 반군 지도자로 2차 체첸 내전을 일으켰다. 모스크바 대학 법학부에 지원했으나 낙방했고 이후 1991년 체첸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했으나 조하르 두다예프에게 낙선했다. 그 뒤 반군에 들어가 1차 체첸 내전에 참가했고 1995년 결사대 200명을 이끌고 부됴노프스크 병원에서 인질극을 벌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가 체첸과 협상에 나서면서 체첸의 민족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후 1996년 12월 대선 출마를 했으나 아슬란 마스하도프 대통령에게 패해 1997년 4월 체첸 제1부총리로 임명되었다.

1998년 1월~7월에 총리에 올랐고 총리직 사퇴 후 1999년 다게스탄을 근거지로 다시 2차 체첸 내전을 일으켜 많은 인질극, 테러 등을 벌였다.

2006년 인구시 공화국에서 폭발물 운송 중 폭사했는데 러시아 보안청 특수부대에서는 특수 작전에 의해 사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1997년 베트남 여객기 프놈펜 인근 추락

1997년 9월3일 오후2시 승객과 승무원 등 66명을 태운 베트남항공 815편 여객기가 캄보디아 프놈펜의 포첸통 국제공항에 착륙하려다 추락, 한국인 승객 24명(YTN, 조선일보 보도는 21명)을 포함해 65명이 숨졌다. 타이 어린이 1명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 여객기는 1차 착륙에 실패한 뒤 재착륙을 시도하다 활주로 착륙지점을 지나치자 다시 상승하려다 야자수에 꼬리 부분이 부딪치면서 논바닥에 추락했다. 사고 당시 공항 근처에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열대성 호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사고 여객기는 이미 단종된 80석 규모의 구 소련제 TU-134기종이었다.

1969년 베트남 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 호치민 사망

1969년 9월3일 베트남 혁명가이자 민족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 胡志明)이 79세를 일기로 타개했다. 베트남민주공화국 초대 대통령 재임 중이었던 그의 사인은 심장병이었다.

1890년 반(反)프랑스 저항운동의 핵심지역인 ‘응에안 성 킴리엔’ 마을에서 태어난 구엔신쿵(응우옌신쿵·호치민의 어릴 때 이름)은 평생 70개가 넘는 가명을 사용했다. 프랑스식 국립학교에 재학 중이던 18살 때 조세 반대 시위에 가담, 퇴학당하면서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의 여정이 시작됐다.

프랑스어로 ‘자유’, ‘평등’, ‘우애’란 말을 듣고 가슴이 설렌 청년. 그 말의 참 뜻을 헤아리고자 여객선 주방 보조로 일하며 프랑스로 건너간 청년은 1911년부터 2년 동안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1차 대전이 끝날 즈음 프랑스에서 ‘베트남애국자연합’을 결성,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베트남 민족의 요구’라는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때부터 프랑스 식민당국의 감시를 받기 시작한 호는 점점 깊이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게 됐다. 1925년 베트남혁명청년회 결성, 1930년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베트남공산당 창당을 거쳐 1940년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의 결성으로 독립운동에 전기를 마련한 호치민은 1945년 9월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한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국민 총 봉기를 이끌어 구엔왕조를 멸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종주국으로 복귀한 프랑스가 영국·중국과 거래 끝에 베트남 전역에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는 대(對)프랑스 항전을 시작했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1954년 그의 동지인 보구엔지압 장군이 이끈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로 일단락됐지만, 당시 체결된 제네바평화협정으로 베트남은 북위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냉전체제 아래 미국이 프랑스를 대신해 베트남에 들어왔고 60년대 내내 미군과의 ‘정글속의 지루한 전쟁’이 계속됐다.

호치민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그 소탈한 성격과 청렴한 생활로 베트남의 모든 민중들로부터 ‘호 아저씨’라 불리며 존경을 받았습니다. 주월 한국군 사령관을 지냈던 채명신 장군의 회고록에도 사령부의 베트남 여성 타이피스트들에게 제일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서슴없이 ‘호치민’이라고 대답해서 놀랐다는 기록이 있다.

뿐만 아니다. 북베트남과 전쟁 중이던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도 그가 타계하자 “민족 지도자 가운데에 그만큼 꿋꿋하게 오랫동안 적의 총구 앞에서 버텼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헌사를 바쳤다. 심지어 남베트남 시민 대부분도 검은 리본을 달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호치민의 ‘3꿍 정신’은 소박하지만 사회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꿍아’(함께 산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담’(함께 일한다)이 바로 그것이다. 살아 생전 그는 항상 국민과 동고동락했다. 색 바랜 노동복에 왜소한 체구, 마른 발엔 언제나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신고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이 남루한 행색의 지도자를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재를 북·중·남부에 한줌씩 뿌려달라”고 유언을 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는 평생을 꿈꾸던 베트남의 통일을 못보고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국민들은 그의 유언을 거역했다. 그의 주검을 하노이 한복판 바딘광장에 안치한 것이다. 지금도 그의 묘소에는 참배객의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호치민은 한국의 대표적 지도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삶에서 감동받아 그의 기일을 손수 챙기기도 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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