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9일] 미-일, 제국주의자들의 우정

“미개한 필리핀, 한국…미-일 통치 마땅하다”…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년 7월29일 일본 도쿄를 방문해 가쓰라 다로 수상과 이틀 전부터 장시간 회담을 해오던 미국 육군성 장관인 윌리웜 태프트는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합의사항을 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긴급 타전했다. 이른 바 ‘카스라-태프트 밀약’이 미국 정부에 공식 전달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1904년 2월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그해 5월 각의에서 대한방침?대한시설강령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하기 위해 새로운 대한 정책을 결정했다. 일본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군사적, 경제적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외교적 협상 구도를 미국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협조는 불가피했다. 일본에게 절실했던 것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열강으로부터 확인받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일본에 대해 지지의사를 표명한 나라가 미국이다. 당시 미국 또한 필리핀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으나, 국제적으로 공식적으로 필리핀의 통치권을 확인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밀약이 있기 이틀 전인 27일 태프트는 일본 도쿄에서 가쓰라 다로 수상과 장시간 회담을 했다. 그 자리에서 양자간 성립된 양해사항은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한,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태프트가 이 밀담의 내용을 전보로 본국에 보고한 것은 7월29일이었고 이 전문 보고서를 읽은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이틀 뒤인 7월31일 그 내용을 전면적으로 승인한다는 답전을 태프트에게 보냈다. 지금은 우방국을 자처하는 미국이지만, 당시 미국이 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필요한 시간은 고작 나흘이면 족했던 셈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알려진 이 문건은 7월29일 태프트가 일본에서 워싱턴으로 보낸 전문을 말하는데, 미국이 국제법상의 조약도 아닌 밀약의 형식으로 비밀리에 일본에 조선의 지배권이 인정됐다.

또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미?일 양국이 모두 극기에 붙였기 때문에 1924년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기록에는 서명된 조약이나 협정 같은 것은 없었고, 일본-미국 관계를 다룬 대화에 대한 각서만이 있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떤 공세적 의도도 갖지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점. 둘째 일본축의 일본-영국-미국 ‘비공식 동맹’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조약적 의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 셋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재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사안은 세 번째 사안이다. 일본의 총리 가쓰라는 “러일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대한제국이었다”며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대한제국은 또 다시 다른 세력과 조약이나 협정을 맺어 러일전쟁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상태로 돌아가는 경솔한 모습을 보일 것이므로, 대한제국 문제에 대한 종합적인 해결을 도출하는 것이야말로 러일전쟁의 논리적인 귀결이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1차 한?일 협정을 하면서 한반도 대륙을 삼키겠다는 목적을 가진 일본 총리가 이런 말을 했다는 자체가 그 당시 한반도의 취약하고 열약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내세운 논리, 즉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가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럼 왜 미국이 일본의 주장을 우호적으로 받아들였을까. 그것은 몇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무엇보다 루스벨트의 인종주의적 문명관과 친일론적 인식이 중요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여기에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 곧 주된 관심사인 중국시장에 대한 복안이 결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미국은 이미 1899년과 1900년 2차례에 걸쳐 중국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해놓은 터였다. 군사적 개입이라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이 중국시장, 나아가 아시아의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일본과 거래가 그들에게 큰 이점이었다.

미국의 제 26대 대통령인 데오도어 루즈벨트(왼쪽)와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제 27대 미국 대통령 태프트는 미개한 필리핀과 한국이 각각 미국과 일본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점을 국제사회에서 추인받기 위해 애를 썼다.

또 필리핀을 군사 주둔지로 만들기 위해 1898년 필리핀 내에서 벌어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필리핀의 정부와 국민들이 국가를 운영하지 못할 것이라는 핑계로 필리핀에 미국에 합병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지배 야욕을 드러낸 선언이었다.

몇몇의 필리핀 혁명군들은 미국에 맞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고 점차적으로 혁명군은 미군에 의해 짓밟혔다. 태프트는 “현재 필리핀의 상황은 지옥보다 좋지 않다”며 “미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시기다”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했고 필리핀 통치의 승낙을 받았다.

미국의 사절단 대표였던 태프트 장관은 필리핀인들을 ‘태평양의 흑인’으로 봤다. 그는 필리핀 방문 때 “나는 여러분에게 독립을 주러 온 게 아니다. 때가 되면 독립을 이루겠지만 다음 세대에도, 아마도 100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개연설을 하기도 했다.

공화당 대표로 제 26대 대통령을 지낸 루즈벨트는 그로부터 4년 뒤인 2009년 태프트를 공화당의 공식 제 27대 대통령 후보로 추천한다. 태프트는 그래서 5년 임기의 미국의 제 27대 대통령을 했고, 몇 년 뒤에는 제 10대 미국 대법관도 역임했다.

한국과 필리핀은 불과 100년 전 미국으로부터 그런 수모를 받은 ‘동병상련’이 있다. 100년이 지난 지금 양국 국민은 미국의 천박한 제국주의자들이 디 이상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에서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그런 믿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라면 애당초 제국주의의 배타적인 식민지 수탈은 없었을 것이다. 맹수는 스스로 선한 의지를 쫒아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윤희락 통신원?이상현 기자 ?news@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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