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성경속 ‘공의와 정의’…공정한 세상은 어떻게 이뤄질까?

레위기 5장

“만일 그의 손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에도 미치지 못하면”(레위기 5:11)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있었고, 비둘기 두 마리조차 드릴 여력이 없어서 소량의 곡식을 드릴 수밖에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다 똑같이 종살이를 했고, 다 똑같이 출애굽을 경험했으며, 삼시 세끼에 필요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빈부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물에 관한 하나님의 요구가 빈부의 격차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성경은 인간 실존이 고스란히 반영된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22:2)

광야에서도 가난과 부가 공존했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가지는 공평함’은 본질적으로 허상일 가능성이 큽니다. 경제적 분배를 통해 불평등을 제거하겠다는 시도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정함일까요?

성경에는 ‘공의와 정의’라는 말이 늘 함께 등장합니다. 정의(미쉬파트, מִשְׁפָּט)는 사법적 정의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절대적 원칙이며, 법률에 의해 작동하는 정의입니다. 이 미쉬파트에 의하면,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해서 편벽되이 두둔해서는 안 됩니다(출 23:3).

반면에, 공의(체데크, צֶדֶק)는 관계적 정의입니다. 이는 법보다는 인격과 양심에 의해 작동합니다. 체데크에 의하면 가난한 자의 저당물은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어야 했습니다(신 24:12-13).

신앙이란 체데크의 극대화입니다. 미쉬파트와 체데크는 상호보완적이지만, 때로 체데크가 미쉬파트를 넘어섭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자리였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 선고는 죽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심판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값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죄가 없는 예수님이 값을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의입니다.

체데크가 빠진 정의는 정죄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가 극대화될수록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고 희생양을 만드는 데 전문가가 됩니다. 체데크는 자발적으로 희생양이 됨으로써 의를 이루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느 누가 희생양을 자처하겠습니까? 굳이 지지 않아도 될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신이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지 않은 채 정의로울 수 있는 경제나 정치 체제, 이념이 과연 있을까요?

미쉬파트와 체데크는 상호보완적이지만, 때로 체데크가 미쉬파트를 넘어섭니다. 십자가가 바로 그런 자리였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사법적 선고는 죽음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심판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값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죄가 없는 예수님이 값을 치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의입니다. 체데크가 빠진 정의는 정죄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의가 극대화될수록 사람들은 희생양을 찾고 희생양을 만드는 데 전문가가 됩니다.(본문에서)

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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